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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族圖記
작성자 오결주 [2022-10-27 09: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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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7_084504.jpg

族圖記 註 解

처음 내가 나이 어리고 철 모를때에 先親께서 

世上을 떠나시고 여러 叔父도 다 일찍 돌아가셔서 

先代世系의 내력만이라도 도무지 들어본일도 없었고 

또한 물어볼만한 곳조차 없어 항상 한이 되어 오다가 

내가 中年에서야 어느편으로 先世의 族圖가 族兄 

安國씨댁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히 찾아가서 알아본즉 족자 하나가 있는데

 크기가 한間 벽만하고 위에는 

始祖 檢校軍器監의 姓氏와 諱字가

기록되어있고 그 아래에는 線을 치고 거기에 

各波의 内外 子孫의 世系와 職함과 諱字를 

자세하게 기록한것이다

이것은 原來 同宗孫 工曹典書 諱 光廷씨가 

친히 시작만 하시고 미처 정리를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뒤에 그 아들 成均直學 諱 先敬씨가 

그 元本대로 그려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룩하고 끝에 跋한것이 또있었다.

 

내가 그것을 三次 뒤져보다가 비로소 先世의 來歷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빌려다가 複寫할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安國씨가 혹시나 분실되지나 않을가

염려하여 快히 應하지 않으므로 다만 우리 派만을 

기록하고 그外에 안밖支孫을 기록할 겨를이 없어

다음 기회에 다시 와서 다 베끼려고 생각하였더니

얼마 안되어 安國씨가 세상을 떠나시고 또한 나도

겨를이 없어 미루어 오다가 결과를 맺지 못한체

壬辰倭亂을 당하여 전국민은 물결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都城은 廢墟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그 그림도 반듯이 保管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때에 전부 謄寫

못한것이 一生에 큰 한이 되었더니 지난가을에

내 아우 希哲이가 土塘村(방아다리) 先塋下에

이사하였을때 다행히 水原땅에 사는 安國씨의 

아우 憲國씨의 아들 璞을 만나서 그族圖의 행방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당초에 땅에 묻어 온전하게

보관되어 그집에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다시

그것을 빌려 볼수 있겟다하여 스스로 기쁨에 넘쳣다

 今年 봄에 나의 둘째 아들 允諧로 하여금 水原에가서

그 그림을 빌려다가 일일히 元本에 의하여 전부 

기록은 하였으나 땅에 묻어 둔지가 오래되어 썩고

脫落된 곳이 있는것을 겨우 알아내어 쓰도록 하고

인하여 允諧로 하여금 널리 高祖進士公 이하 자손과 

支派의 안밖 世系까지 구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게하여 한권 冊을 만글어 놓고도 또 널리

퍼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의 아들 四人으로

하여금 各各 한권씩 써서 後孫으로 하여금 永遠히

傳하여 가며 보도록 하였고 또 五代祖 護軍公以下

墳墓가 계신 州와 縣의  멀고 가까운 거리며 石物의

有無며 山名 동네 이름까지도 모조리 位(그 어른)

아래에 기록하여 후세자손으로 하여금 墓 山의 소재를

알고자하면 찾아보기 쉽도록 함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 아니랴..

司僕卿公 이상의묘소는 끝까지 알아보아도 어느곳에

있는지 알수없으니 이런 애달픈 일이 어디 있을까

슬프다 우리 吳씨의 먼조상이 어느대로부터 내려

오셨는지 알수없다

 直學의 跋文에도 또한  먼세대의 내력을 말씀하지

않고 바로 軍器監으로서 始祖를삼았는데 이 어른은

新羅末 高麗初의 어른인데 내게이르기 十三代祖가

되신다 

그 어른 뒤로 부터 안밖 자손이 대대로 큰 벼슬을 하고

훌륭한 가문들과 혼인도하였으며 或은 王의 后와

妃子(왕의 아내)로 나간분도 있으나 다만 同族이 많이 

퍼지지 못하고 적어 놓은것도 얼마되지 않은데다가 

李氏朝鮮時代에 들어와서는 더욱번성하지  못할뿐더러

우리 曾祖 提檢公은 특이한 자품에 글 잘하기로 

유명하였으며 連하여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여러번

大科(고등고시)장중에 出入하고 著作한 詞試는 여러사람의

입에 구전되었으나 마침내 드러나지 않았으니 아마도

運이 不吉한 탓인듯하다

우리선친께서도 또한 三男을 두셨는데 내가 맏이되고

나역시 또한四男을 두었는데 맏아들 允謙이 늦게야

文科를 하였고 그아래 세아들들은 다 공부를 하는중 

각각 아들을 낳아 그수가 이미 八人에 이르럿다

그러나 아직도 생산중에 있으니 이數字에만 국한

되지 않을것이다 쇠잔한 門戶를 창성하게 하고

떨치게 할것을 나의 자손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其他 종족의 갈라저 나간것은 모두족보에 

기록되었은즉 구태여 다시 기록할것이 없기에 이제

다만 日誌에 圖本을 옴겨 기록하여 後日 參考가

되게 하려한다

 

萬曆 庚子(宣祖三三年 서기1600년.五月五日)에

  平康  西村客舍에서 이글을 쓰노라

♥상기 기록은 贈領議政 諱 希文께서 처음 舍人公의

圖本을 求하여 增補하며 편집하고 因하여 기문을 짓고

둘째 아드님이신 都正公으로 하여금 復本을 만드셔서

증영의정공의 史著作 <瑣尾錄>끝에 附錄한것이다

다만 古蹟이 될뿐만이 아니라 또한 참고와 史料의

보충이 될듯 하기에 삼가 여기에 붙여 기록하는 바이다♥

 

출처 해주오씨 전서공파보소

                1977년7월 간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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