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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주 휘 인유공 4세 휘 札公 처증조 휘 최루백공 이야기(퍼온글)
작성자 오결주 [2018-08-22 15: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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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의 아내 고려여성 염경애

 

고려시대에 염경애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그의 남편은 최루백(崔婁伯)인데(고려사-열전)에 효자로 그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염경애는 결혼한 지 23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최루백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여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무덤에 넣어두었다.

우리나라 여자의 묘지명으로 남편이 쓴 것은 흔치 않은데, 고려시대 염경애의 묘지명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구구절절 스며 있다.
이는 남녀차별이 존재했던 시절에 매우 특별했던 일이라 역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염경애의 집안은 당대의 명문가였다.
어머니 의령군 대부인 심씨는 추밀원 고위관리의 딸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근면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며, 결혼해서도 아내나 어머니의 역할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자녀들을 잘 훈육하여 훌륭하게

키워냈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녀가 염경애이다.
염경애는 유학적인 집안분위기와 어머니의 현숙한 가르침을 받아 부덕을 갖춘 지혜로운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5세 때 최루백과 결혼했는데, 시댁은 수원지방의 향리를 지낸 가문으로, 남편은 늦게 과거에 합격했다.
과거를 늦게 본 데는 그 까닭이 있었다.
최루백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죽었다.

이에 최루백은 위험하다고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호랑이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그리고는 호랑이 배를 갈라서 아버지의 뼈를 추려 모아 장사를 지냈다 한다.
그 후 아버지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의 거상이 끝난 뒤, 어머니를 부양하면서 과거 준비를 하여 뒤늦게

급제했다.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얻었지만, 말단 관직이라 생활이 가난하여 그의 처 염경애는 아들딸 여섯을 낳아

기르며 많은 고생을 했다.

그 후 최루백의 관직이 점점 높아져 간관이 좌정언(左正言)이 되었을 때, 염경애는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최루백은 기뻐하는 아내에게 간관은 청백리라 녹(월급)이 많은 관직이 아니라고 하자, 이에 염경애는

"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이 전각의 섬돌에 서서 임금과 시비를 논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 삼태기를 이고 가난하게 살아간다 해도 마음이 기쁘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최루백은 이 말에 감동하여 보통 여자의 말이 아니라고 감탄하며 아내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이 더욱

극진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생활이 제법 펴 살만하게 되자, 아깝게도 염경애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믿고 의지하던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남편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루백은 아내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담아 살아있을 때의 그녀의 공적과 뜻을 기렸던 것이다.

특히 묘지명의 마지막 구절은 읽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믿음과 맹세를 잊지 않았으나 함께 죽지 못한 것 매우 애통하네
아들딸 기러기처럼 날으니 기필코 당신의 뜻대로 고귀하게 대대로 번창하리』

최루백이 묘지명에 기록한 아내 염경애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내용을 보면, 우선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

남편에 대한 내조, 자녀들에 대한 교육적 감화를 통한 가정에서의 충실한 역할을 칭송하고 있다.
홀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시아버지에 대해 생전에 섬겨보지 못한 효도를 다하여 명절이나 기일에

몸소 제물을 드리고 옷을 지어 영전에 바쳤으며, 남편이 전쟁터에 나갈 때는 갑옷 위에 입는 옷인 자주색

전표(前表)를 만들어 보내주었으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때로는 전장에 음식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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