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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曺判書負暄堂吳公行狀
(이조판서부훤당오공행장)

公姓吳諱祥字祥之號負暄堂海州人五代祖諱?守司僕寺正高祖諱霖禦侮將軍曾祖諱仲富司直贈?曺參議祖諱淳進士考諱禮孫禮曺佐郞知製敎贈禮曺判書有厚德重望而早世祿位不顯?贈貞夫人安東盧氏尼山縣監佑賢女公以正德七年壬申十月二十六日生于崇禮門外第公天資卓異聰悟絶人自?齡己有志於爲己之學與伯氏慶受學慕齋之門兼治制擧業年十三選泮試殊等所作悲?谷賦傳誦一時嘉靖辛卯九月中進士三等第十人甲午九月擢大射禮別試丙科第二人公獨不受四館玩侮之戱先進皆目之以爲剛分隷校書館辛丑例陞成均館典籍轉刑禮二曺佐郞壬寅拜江原道都事癸卯入爲侍講院司書屢爲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甲辰差撰修廳郞廳時恭僖大王昇遐充告訃使書狀官如京師丙午除軍器寺副正戊申拜司諫院司諫爲陳復昌輩所中遞授內贍寺副正冬黜爲羅州牧使公時邀州中人士與之講論以倡絃歌之俗旣還羅民懷遺愛立祠享之壬子冬拜弘文館修撰移副校理會上命選朝臣廉謹者公在選中特賜表裏一襲以寵之癸丑丁母夫人憂乙卯服?授校理尋陞應敎典翰直提學冬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序陞至右承旨辭遞授僉知中樞府事丁巳春除江原道觀察使戊午秩滿還以?曺參議屢拜承旨己未特加嘉善大夫拜弘文館副提學庚申以冬至使如京師辛酉還朝由司憲府大司憲歷司諫院大司諫成均館大司成兵?二曹參判常兼藝文館提學世子侍講院左副賓客癸亥朝廷憂西南徑解方伯擇公爲慶尙道觀察使甲子以病遞己而除禮曹參判隆慶戊辰秋西鄙有虜?以公有文武才進秩資憲大夫授平安道觀察使公旣之任邊警遂息己巳以兵曹判書召還銓注公平人咸稱服歷吏禮刑三曹判書大司憲漢城府判尹兼知經筵事及都摠府都摠管辛未拜副提學常因侍講請罷宮池之役被上嘉納壬申穆宗皇帝崩以進香如京師癸酉還拜大司憲三月八日以疾卒訃聞上震悼輟講筵賜祭葬于楊州陶山瓦谷卯坐原有遺稿若干卷藏于家公學有淵源文章與金澍閔箕鄭惟吉沈守慶諸人齊名號八文章由是才望溢世當時名公卿多引以爲重焉嘗因使事過閭陽遇賊公登城吹口笛賊聞之鮮圍去後再過其城故老持酒說前事以謝云盖其精氣有足以動人者不然何以感百千?暴之心於呼?之間乎公亦人豪也哉公娶平山申氏玧之女與公同塋異墳有男三人女二人男長以和承義副尉次以順進士郡守次以寬贈承旨女長適判書鄭士雄次適注書宋惟健內外孫曾多不盡錄不?生後公二百年且固陋無所考據特?公後孫所爲家狀謹列如右

吏曹判書吳載純撰

이조판서 부훤당 오공 행장 주해

부훤(負暄)공의 성은 오(吳)씨이고 이름은 상(祥)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당)이며 관향은 해주이다. 5대조의 이름은 충수(?守)인데 사복시(司僕寺, 고려시대 궁중의 乘輿ㆍ馬匹ㆍ牧場 등을 맡아보던 관청) 정(正, 정3품관)을 지내셨고 고조부 임(霖)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조선시대 무관의 품계로 정3품관)이셨으며 증조부이신 중부(仲富)는 사직(司直, 조선시대 五衛에 속했던 관직으로 정5품관)을 역임했는데 뒤에 이조참의(吏曺?議, 조선시대 관직으로 정3품관)로 추증 되었고, 할아버지 순(淳)은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모두 합격했는데 돌아가신 뒤에 이조참판(吏曺?判, 조선시대 관직으로 종2품관)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예손(禮孫)은 예조좌랑(禮曺佐郞, 조선시대 관직으로 정6품관)으로 지제교(知製敎,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왕에게 敎書 등을 起草하여 바치는 일을 맡아 보았으며 정6품이상의 문관이 겸직했음)를 겸직하였고 사후에 예조판서(禮曺判書,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정2품관)로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원래 후덕하며 많은 사람들의 희망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일찍이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다. 공의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조선시대 外命婦로서 2품벼슬 문무 관원의 부인에게 주는 封爵)에 추증되었는데 안동노씨로서 니산(尼山, 지금의 沃川) 현감(縣監, 조선시대 지방장관으로 종6품관원이 임명됨) 우현(佑賢)의 딸이다. 선생은 정덕7년(正德壬申, 1512) 10월 26일에 숭례문(崇禮門, 지금의 남대문) 밖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본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기가 보통 사람과 달라 어린 나이에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백씨(伯氏, 형님) 경(慶)과 함께 모제(慕齋, 모제는 金安國의 호)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아울러 시(詩)를 짓고, 문(文, 산문)을 짓는 공부를 하여 나이 十三세 때에 승보시(陞補試, 조선시대 과거의 일종)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그 때 지은 글은 비형곡부(悲?谷賦, 글의제목임)라는 글이었는데 한동안 왼갖 사람들에게 서로 서로 전해가며 읽혀지기도 하였다. 가정(嘉靖, 明나라 世宗의 연호) 신묘(辛卯, 1531)년 9월에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는데 그 때 합격한 사람은 모두 一○명에 불과 하였다. 갑오(甲午, 1534)년 9월에 대사례(大射禮, 조선시대 임금이 成均館에 가서 先聖에게 祭享하고 활을 쏘던 예)의 별시(別試,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임시로 보이던 과거)에서 병과(丙科, 조선시대 殿試에 합격한 사람을 시험성적에 따라 나눈 등급의 하나로 甲科3명, 乙과7명, 丙科23명을 뽑았다) 2위로 뽑혔으나 정작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사관(四?, 成均館ㆍ藝文館ㆍ承文院ㆍ校書館)의 관원들의 보잘 것 없다는 희롱을 받지않으리라 생각하여 먼저 나아가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강경한 성격이라해서 나누어 승문원(承文院, 조선시대 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기관)에 예속시켰다. 신축(辛丑, 1541)년에 관례에 따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정6품관)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형조(刑曺, 조선시대 법률ㆍ소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와 예조(禮曺, 조선시대예악ㆍ제사ㆍ연회ㆍ朝聘ㆍ학교ㆍ과거등을 관장하던관청) 의좌랑(佐郞, 조선시대 6조의정 6품관)을 역임하고 임인(壬寅, 1542)년에 강원도도사(都事, 외관직의종 5품관으로 지방관청에서관리의감찰ㆍ규탄을 맡아보았다. )에 제수되었으며, 계묘(癸卯, 1543)년에 중앙으로 다시 들어와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조선시대 世子를 모시고 경학을 강론하던 관청) 사서(司書, 정6품관)가 되었는데 그 뒤로 여러번이라 사간원(司諫院, 조선시대3司의 하나로 간쟁ㆍ논박을 맡아보던 관청) 정언(正言, 정6품관)과 사헌부(司憲府, 조선시대3司의 하나로 감찰 행정을 맡아보던 지금의 언론기관의 일종임)의 지평(持平, 정5품관)을 두루 번갈아 역임하였다. 갑진(甲辰, 1544)년에 선수청(選修廳, 비변사의 異名. 조선시대 군무의 기밀을 맡아보던 관청)의 낭청(郞廳, 종6품관이 되었는데 마침 공희대왕(恭僖大王, 중종)께서 승하하자 고부사(告訃使, 왕이 죽으면 明에 가서 이를 알리던 사신)가 되어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에 갔다. 병오(丙午, 1546)년에 군기시(軍器寺, 조선시대 兵器旗幟戎仗什物을 맡아보던 관청) 부정(副正, 종3품관)에 제수되었고, 무신(戊申, 1548)년에 사간원 사간(司諫, 종3품관)에 임명되어 진복창(陳復昌, ?~1563)의 무리와 함께 일하다가 도중에 체직되어 내섬시(內贍寺, 조선시대 宮中의 供上을 맡아보던 관청) 부정(副正, 종3품관)에 제수되었다가 겨울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나주목사(牧使, 지방관청 의장으로 정3품관이 임명됨)가 되었다. 목사로 있을 적에 수시로 고을에 인사들을 맞아 서로 경전을 강론하고 고을에 미풍양속을 일으켜 치정을 잘 하였으므로 임기를 마치고 중앙관직으로 돌아간 후에 나주백성들은 그의 치적(治績)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향(祭享)을 올리기도 하였다. 임자(壬子, 1552)년 겨울에 홍문관(弘文?, 조선시대 三司의 하나로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 역활을 하던 관청) 수찬(修撰, 정6품관)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부교리(副校理, 종5품관)로 승차되었는데, 때마침 임금께서 조정관원들 중에 청렴결백하고 근검한 자를 뽑는 청백리(淸白吏) 선발이 있었는데 부훤선생께서 거기에 뽑혀 임금으로부터 표리(衰裏, 상으로 하사하는 옷의 안감과 겉감) 한 벌을 하사받았다. 계축(癸丑, 1553)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낙향하였다가 을묘(乙卯, 1555)년에 3년 상을 마치자 교리(校理, 홍문관의 관직으로 정5품관)에 임명되었다가 응교(應校, 홍문관의 관원으로 정4품관) 전한(典翰, 홍문관의 종3품관)을 거쳐서 지제학(直提學, 홍문관의 정3품관)에 올랐으며 그해 겨울에 다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문무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받았던 官階)에 가작(加爵)되어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왕명을 出納하던 관청 즉 요즈음의 대통령비서실 격임)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관)가 되었다가 다시 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관)로 옮겼는데 스스로 사직하고자 하니 그의 몸이 좋지 않음을 안 임금께서는 한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중추부에 소속된 정3품당상관으로 임명되던 한직)로 제수하였다. 정사(丁巳1557)년 봄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 외직의 지방 장관으로 종2품 지금의 도지사)가 되었으며 戊午1558년에 임기를 마치고, 중앙으로 돌아와 호조(?曺, 조선시대 중앙관청으로서 ?口貢物 부역식량 등을 맡아봄 6조의 하나로 지금의 재무부) 참의(?議, 정3품관)가 되었고 그동안 여러차례 승지(承旨, 승정원의 정3품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기미(己未, 1559)년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시대 종2품관원에게 주던 官階)에 올라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정3품관)이 되었으며, 경신(庚申, 1560)년에는 동지사(冬至使, 년중 동지를 전후하여 중국에 갔던 사신으로 三公이나 六曺의 判書가 갔음)가 되어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신유(辛酉, 1561)년에 돌아왔다. 그 후 사헌부(司憲府, 조선시대 3사의 하나)의 대사헌(大司憲, 종2품관)과 사간원(司諫院, 조선시대 3사의 하나의 대사간(大司諫, 정3품관)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대사성(大司成, 정3품관)을 두루 역임 하였으며, 병조(兵曺, 6조의 하나로 조선시대 군사업무를 맡아보던 관청, 지금의 국방부)와 호조(?曺)의 참판(?判, 종2품관)을 거치는 동안 늘 홍문관(弘文館, 조선시대 3사의 하나)과 예문관(藝文館, 임금의 勅命과 敎命을 기록하던 조선시대 관청)의 제학(提學, 종2품관)ㆍ세자시강원의 좌부빈객(左副賓客, 정2품관)을 겸직하였다. 계해(癸亥, 1563)년에 조정에서는 서남지방의 환란이 생겨 그 곳의 방백을 해직시키고 선생을 발탁하여 경상도관찰사로 삼았다. 갑자(甲子, 1564)년에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 융경(隆慶, 明穆宗의 연호) 무진(戊辰, 1568)년 가을에서쪽으로부터 오랑캐의 침략이 있었는데 선생이 문무에 뛰어난 적격자로 판단되어 차례를 뛰어넘어 자헌대부(司憲大夫, 조선시대 정2품관원이 받았던 官階)의 품계에 올라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임지에 이르러 변방순찰을 강화하고 경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 오랑캐들의 빈번했던 침략이 사라지게 되었다. 기사(己巳, 1569)년에 병조판서로 소환되었는데 그는 모든 인재관리에 있어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적재적소에 인사를 등용하여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하였다. 그는 또 이조ㆍ예조ㆍ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대사헌(大司憲)ㆍ한성판윤, 정2품관)겸 지경연사(知經筵事, 정2품관원이 겸직) 및 도총부(都摠府, 오위도 총부를 일컬음 이며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던 최고의 군직관청)의 도총관(都摠官, 정2품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신미(辛未, 1571)년에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관)에 제수되었는데 한번은 시강을 하다가 임금에게 궁지의역사(宮池之役)를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왕께서 흔쾌히 허락하신 바도 있었다. 임신(壬申, 1572)년에 명나라에 목종(穆宗)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자 진향사(進香使, 조선시대 중국의 황제가 죽으면 향과 제문을 가지고 가던 사신)가 되어 경사(京師, 중국의 서울)에 갔다가 계유(癸酉, 1573)년에 귀국하여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 해 3월8일에 병으로 죽으니 부고가 임금에게 전해지자 임금은 크게 슬퍼하여 강연을 거두시고 장례에 쓸 물품을 하사하시고 장례절차에 소홀함이 없도록 명하시었다. 양주고을 도산(陶山) 기와골(瓦谷)에 안장하니 좌향(坐向, 묘의방향)은 묘좌유향(卯坐酉向, 즉 서향)이다. 선생의 유고(遺稿) 몇 권이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깊이와 뿌리가 있어 그의 문장은 당대의 석학이었던 김주金澍, ?~1404)ㆍ민기(閔箕, 1504~1568)ㆍ정유길(鄭惟吉, 1515~1588)ㆍ심수경(沈守慶, 1516~1599)등 여러 문장가들과 어깨를 같이 할 수 있었으니 당시 세간에서 이들을 조선중기의 8대문장가라고 칭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재주와 덕망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당시에 이름있는 문장가와 벼슬아치들이 서로 서로 교유하면서 더욱 선생을 중하게 대우하였다. 언젠가는 사신이 되어 중국의 여양(閭陽, 지금의 遼寧省北鎭縣서남)고을을 지나다가 도적떼를 만났는데 선생께서 성위에 올라가 피리를 불었더니 도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느낀바 있어 포위하였던 것을 풀고 가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 다시 그 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전날의 일을 알고 있던 마을노인들이 술을 가지고와서 대접하며 지난 날 그 일을 이야기하며 사례하였으니 그 정기가 충분히 남의 마음을 움직일만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 못 하면 어떻게 수많은 강포한 도적 때의 마음을 짧은 시간에 감동시킬 수 있었겠는가? 선생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영걸한 정기가 있었던 사람이다. 선생은 평산신씨(申氏) 윤(玧)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그 부인의 묘 또한 같은 곳에 안장하였으나 봉분을 달리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셋 딸이 둘이 있었으니, 큰아들 화(和)는 승위부위(承義副尉, 조선시대 정8품무관)를 지냈고, 둘째아들 순(順)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군수(郡守, 조선시대 지방郡의장으로 종4품관)를 지냈고 셋째아들 관(寬)은 승지(承旨)에 추증 되었다. 큰딸은 판서를 지낸 정사웅(鄭士雄, 1536~?)에게 출가하였고 작은딸은 주서(注書, 조선시대 승정원 정7품관) 송유건(宋惟健)에게 출가했다. 손자ㆍ외손자ㆍ증손자의 수효는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후손으로서 선생이 돌아가신 뒤 200여년이나 지난 지금 재질도 없는데다가 선생의 행적을 상고할 길조차 없어 다만 그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행장을 거두어 위와 같이 삼가 서술하였다.

이조판서오재순(吳載純)지음




忠貞公陽谷諱斗寅諡狀
(충정공 양곡 휘 두인 시장)

公諱斗寅字元徵號陽谷吳氏系出海州著籍自高麗檢校軍器監監諱仁裕世有仕宦曾祖諱定邦武科慶尙左兵使光海將廢母后脅百僚廷議對言臣武夫只讀史略初卷烝烝乂不格姦一句聞者壯之祖諱士議宗親府典簿贈左?成以孝聞考諱?慶尙道觀察使贈左?成號天坡以文章政事顯早世不盡用?固城李氏兵曹?判諱成吉之女也本生考諱翔有文行數奇不第?就蔭仕止司僕寺主簿公以天啓甲子九月三十日辛巳生是歲天坡公航海朝天臨行顧夫人曰海道危甚歸期未可卜若弟婦生男可取以爲子已而公果生大夫人?擧而養之幼?秀端重不喜從?兒嬉戱常侍長者側服訓無違以故器度早成詞學驟進年十歲從天坡公在海西巡營詔使程副摠龍來天坡公?勞于境公從往觀焉程公目而異之呼至前命韻賦詩公援筆立書曰有美河南産東征報聖君由來程不識猶勝李將軍程公大驚歎?爲和其韻詩具載皇華集中程公厚遺綵幣文房之玩公只受一?餘悉辭焉程公益加敬重屬天坡公曰令兒宰輔器其進未可量也還至?島又贈經籍匹驢致書奬勉有加於是公名動一世矣明年天坡公作?西塞還道卒于松都公奔哭扶?而歸不以穉廢禮卿士郊弔者莫不奇之己卯丁祖?貞敬夫人李氏憂戊子魁進士發解遂登上舍己丑春擢別試狀元所對策人多傳誦例授成均館典籍累拜兵禮二曹郞孝廟元年庚寅拜司憲府持平時司諫張應一託應旨進言意在激天怒以禍善類公謂此而不斥無以正朝廷杜奸萌請置之罪言雖不行時論快之辛卯嶺南儒生再亂試?朝議擇遣考官有聲望可鎭服人於是公自兵曹郞出爲慶尙都事慰諭?治兩盡其道?屋晏然明年春以侍講院文學召還兼春秋館記事官與修仁祖實錄歷正言持平成均直講兵曹正郞時有名士?銓薦者浮妄善害人公顯斥之其人因以補外後銓路右其人出公爲高山道察訪淸簡守法驛路肅然未幾以正言還朝遞拜海運判官漕粟羨餘例歸私用而公不以升斗自累旋移司書丙申春爲正言時諸路推刷方急三南又置營將數行操鍊民甚苦之而又將爲東朝修理宮殿公因災異陳疏歷言其事且請容貸狂?疏遣滯囚以盡警懼之實尋又與同僚應旨上?請緩推刷恤刑獄敷納諫諍策??工孝廟奬以忠言?論深得諫官之體下廟堂議及廟堂請皆如?辭行之復下敎曰審理事予未曉諫臣意公遂與同僚陳疏引咎後數日上命召諫臣賜對引過慰論公?進謝仍陳時弊復如前?指且言內廐馬親臨調習之失?嘉納公又言修理旣命罷矣關東材木之積在江上者宜令列邑各自轉賣以補民上又許之尋以事遞旋拜持平時大司諫?公?劾柳道三與大君語而誤稱臣請罷其職上震怒下獄嚴鞫公啓請還寢未蒙允可而?公己被鞫就竄公又啓言?所坐特妄發耳旣被嚴刑旋竄絶島不幸死於中道其於累聖德何哉上怒下嚴批已而復命遞職憲臣爭不得未幾復拜持平以事遞俄拜兵曹正郞移正言時有宮奴斃於刑訊內司請坐刑曹吏公以爲內官而直請該吏罪漸不可長請罪內官從之丁酉春拜掌令時有無賴輩相朋結挾?鬪亂閭巷苦之公使吏逮捕有王孫家奴亦在捕中匿不出而屢以屬公公猶督捕不置己而公與持平閔公維重自朝退見閔公御者重被人歐傷血淋?不能起公知王孫家奴欲害公御者以逞憾而誤中?與閔公坐府中疾捕訊治卒斃之杖下王孫?甚毁訴于宗簿寺上聞之?遞公及閔公旋用喉司言還仍公與閔公詣臺自列備陳事本末僚臺啓請出仕仍論斥王孫於是上震怒復遞公及閔公大臣筵臣相繼以爲言不聽俄命俱外捕公得北靑判官閔公得鏡城政院三司又力爭不能得公?日赴官不以遷謫自居悉心奉職事官長御吏民咸得其宜秋請暇還京師遭主簿公憂己亥制除拜獻納掌令兼春秋館編修官與修孝廟實錄爲養得洪州牧使未幾坐事罷辛丑?拜獻納夏旱疏陳修省節儉之道得優批秋?廟禮畢與同僚上?深陳愼終惟始之義仍及典學禮賢之道末復陳時弊數事上優納之時上東朝尊號兼?中宮宮戚多?入禁中公以謂出入官掖自有限制?當大禮尤宜嚴截請?治?入者家長公議多之遞拜司諫移司成以冬至使書狀官赴燕明年春還朝在道連拜司諫執義秋選知製敎拜弘文館修撰上將閱武公上疏言閱武之擧雖倣古蒐狩之禮後世沿之未免失遊豫之度雖在豊亨豫大之日尙宜存戒?今天怒未?災??至飢饉?疫死亡相繼正宜夙宵震?以盡修省之實其於出入動息之節何可少忽上賜答優厚冬臺臣郭齊華言事補外兩司方論請還寢而政院遞聽其辭去諫院遂劾承旨上怒甚批辭極嚴公與同僚上?匡救要以節喜怒來諫諍爲歸癸卯拜執義校理冬爲御史湖南按視諸鎭軍實道臣私一邑宰前以兵器事褒聞增秩又屬公爲之地及公至邑見其?弊反甚?上聞抵罪又得道臣不法事未之發也翌年春還朝諫臣劾公不?刺擧道臣罷職夏?拜尙衣院正旋移玉堂乙巳春拜司諫時有?伐寢園木者金吾議陵官罪傳輕律上特命徒配醫官尹後益守圻縣御史發其罪奏當徒配上命許金贖公言大小罪罰各自有律不當以意低昻且論該府不能執奏失有司體上怒嚴敎遞職三司爭不得俄復拜司諫遷校理丙午拜執義時有虹變公上疏極言災異甚酷而上下恬嬉政令因循宜先勉?學問存養對越以爲修省之本法祖宗延訪之勤以通上下之情奴婢虛錄侵及族隣爲今八路極弊宜速行査正以?民困東朝進宴?泉行幸雖皆不得已亦宜隨事?省以恤民力又請疏滯獄以解寃鬱開言路以來忠?反復懇叩累數百言上亦優批奬納旋移玉堂入侍極論內奴婢身貢煩重之弊且曰頃聞有宮女選入之命當此遇災警懼之日在內者猶當放出?添選乎上開納之丁未春淸人以我違犯約條遣使何問擬上躬贖?之罰兩司合啓論諸大臣不能以死自當使君父受辱當爲法受罪上大怒命竄諸諫官政院?奏又命下諸承旨獄時値暮夜闕中惶擾公在直?上?爭之不納明日又與同僚請對極論退復上?曰人有恒言主辱臣死今日之事輿情之所共痛?而聖明以包荒之量懷獨見之明軫念股肱深存大計方其?言之始引以自當終遭罰金之辱而若不介意此正聖人以一國爲度豈常情所能窺測者哉今此臺臣之論雖不審事勢之可否而若其本情則激於主辱之痛耳其又可深罪乎聖人之怒未嘗因物以遷盖以物付物而無我於其間也苦轉相觸?以甲移乙則豈在物不遷之謂也今殿下旣怒於合啓之臺諫矣延及於覆逆之承旨矣且如朴長遠李端錫欲陳所懷未畢其辭而遽加?折特命斥退嚴辭峻罰前後相仍皆不免爲遷怒之歸矣臣恐殿下於本源涵養之功有所未盡旋移執義又請釋諸諫臣辭益?切皆不報冬修理永寧殿畢公以董役勞陞通政拜承政院同副承旨累陞至右承旨己酉春上疏陳情請得一縣養母且有以自?遂拜光州牧使光爲湖南鉅邑公至抑豪右恤?獨政淸事簡吏民安之尤以養育人才爲務月聚邑子弟課其製作務?輒躬至儒宮講說經史未幾彬彬可觀辛亥國大饑公之爲政適三歲矣約己節用倉庾充羨至是發以賑民民不憂食而其所措置又必躬自臨察且引鄕望有幹者同事吏不得旁錄爲奸於是州民無餓死者而朝令郡縣母得受流民公曰焉有視人塡壑而不救者更令里設慕盧接置飮食所全活亦以百數道臣御史相繼褒聞有錫馬之典期滿當遞命仍任以從民願明年秋遞歸士民攀?不忍舍車爲之?長老言公政績曠百年罕覩云癸丑入銀臺陞至左承旨遞爲兵曹?知秋復入銀臺甲寅春丁大夫人憂今上丙辰服?拜兵曹?議左承旨兼內醫院副提調明聖大妃違豫累月復常用侍藥勞陞嘉善同知中樞兼副摠管移漢城右尹冬丁本生繼?李夫人憂己未?判?曹刑曹秋副進賀使赴燕還拜行判決事庚申特除?曹?判夏兼同知義禁府事時逆堅叛誅用鞫獄勞陞嘉義行都承旨兵曹?判是年中子泰周尙顯宗大王女明安公主爲海昌尉辛酉又爲都承旨歷兵禮二曹?判兼同知義禁副摠管壬戌春自兵曹出爲京畿觀察使畿營殘乏殊甚隷卒?數人公曰脫有變難將何以分令諸鎭乃募人爲營卒簡其役而復其?至者累百人令番休聽用畿營至今賴之癸亥因事辭遞尋拜都承旨?曹?判冬特授工曹判書甲子春出爲開城府留守以方伯親嫌遞明聖王后喪監山陵方上事完陞正憲拜漢城判尹聽斷以公請託不行兼知義禁都摠管丙寅冬拜平安道觀察使關西兼領管餉貨積而事劇公年已踰耆而日坐衙聽政細大必親俸入外不私一絲西土人至今稱其廉白明年夏明安公主下世上特命公歸視喪遞知中樞己巳正月拜刑曹判書未幾辭遞三月拜知義禁時一番人新秉政連有大獄鞫治日急相臣以公不?拜命請推考上命牌召至三而公病不赴下吏削職公見時事日非杜門深居日夜憂歎四月中宮將廢公聞而流涕曰吾受四朝渥恩?位卿宰今國事至此寧可以罪廢爲解?無一言乎遂手簡要同志罷官者數人往會于平市署今?曹判書李公世華自江上不期而來前應敎朴公泰輔亦與諸名士謀陳疏聞公在平市署皆來會至者凡八十餘人或言公所處異他人不宜居疏頭子弟亦泣請公終不聽諸名士相議草疏或慮文字太峻則無益而有害公曰事已至此吾輩死何足恤疏入至暮批不下諸公待命於闕外李公曰吾輩雖皆罷散多至八十餘人則便一外朝廷也不可一疏而止要以得請爲期可也公微笑曰恐不及如公言己而上果震怒命親鞫時夜二鼓矣公與李朴二公就鞫公時年六十六衰病體?殆若不自持左右觀者無不人人代怖而公動止安和不失常度旣而天威益震在廷諸臣皆環視默不發一言大司憲睦昌明至以公疏爲凶慘公被考掠幾殊而置對從容辭理不少撓明日命?死安置義州公時病創甚尙能自?初出獄都人士女?道?譁爭先覩其面至有流涕者曰天佑善人老爺顔色殆如常日庶其無虞耶暮宿都門外民家搢紳章甫知與不知皆爭來問公接見無滯諸子請靜臥以便將理公曰吾旣暫時人欲與知舊面訣耳?到坡州疾寢?以五月七日卒于旅舍七月葬陽城治西天德山先塋坐乾之原朴公配珍島先公二日道卒于漢水之陰未幾因筵臣陳白命皆復官秩其後六年甲戌上大悔前事旣復中宮位?遣官賜祭又因儒生言敎曰忠節可尙遂贈議政府領議政兼帶如例仍命族其門閭坡州及陽城皆建祠以祀而坡則與朴公?享光州之義烈祠北靑之老德書院亦皆以公?食於是聖朝崇節之典多士慕義之誠兩無餘憾矣公身短豊下美鬚髥爲人?雅貞慤少孤篤孝事大夫人五十年未嘗少失其意旣老矣事仲父知事公誠禮不衰日必躬往拜候有故則必手書問起居得一美味必先進乃嘗寡?無歸爲養其子女而業之族?之窮賤者曲加收恤朝暮而食於公者常十數人其接人無城府無機關恂恂而己然亦不肯隨聲和應苟以己從人與人言國朝故典前輩好事終日??不厭獨不喜論人過失及黨議長短爲行不務?飾皎?而內守實確平生無酒色之失居家不一問生産貨利事累典名藩望邑脂膏不潤昏喪?遺稍過節不受簡於遊從雖素嘗親與者貴盛則不造其門顧獨嗜靜坐常灑掃一室簾閣隱?或闔眼終日若不知有人焉歷官內外恪勤守法人莫能干以私刑人必求其可生雖處薄罰小罪亦兢兢焉故見罪者無後言公旣早歲取魁科登朝踐歷淸華而謙約靖退苦無所能處三司首尾十餘年其所匡救?正多矣然亦不以激發彈射爲能尤惡黨此誤國常介然自守不肯??論議立名聲爲高當世之喜持論者亦以此不甚重公緋玉以上率多處冗散而公亦不以爲意至?年戚聯王室尤自?損凡於朝廷時議漠然若不聞也者優?燕閒且足以自老矣及國家有大變故公則首起而當之鼎?在前勇不顧問卒以一死表臣節扶人紀樹風聲於百世非其中有過人之實能如是乎嗚呼賢哉公好視書於諸經尤熟?年授子弟往往倍誦無疑然雅不以文墨自命罕與人往復酬和故身後詩文鮮有藏者云公初娶驪興閔氏?曹判書肅敏公聖?之女男觀周生員才行出流輩早夭女判官南宅夏再娶原州金氏學生崇文之女男鼎周監役女夭三娶尙州黃氏府使?之女男泰周晋周履周女?奉金昌說檢閱崔昌大金令行李縡南宅夏二男道揆道振一女閔承洙金昌說二男一女金令行二女皆幼??而仕于朝見公宰樞間言恭而意下若無足以上人者盖竊心敬之而未習也及其捨命取義雖賁育無以過之於是益知公平日所以自虛者爲尤不可及也今都尉公屬?以太常易名之狀?旣辭不獲且喜得以託名於公事謹?知公者公誦之言爲狀如右敬以告于有司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兼同知春秋館事藝文館提學

世子右副賓容李?謹狀

[譯解]

정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시 충정공(正憲大夫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諡忠貞公)

(天坡公의子)

공의 휘(諱)는 두인(斗寅)이요. 자(字)는 원징(元徵)이요. 호(號)는양곡(陽谷)이다. 오씨(吳氏)의 계통이 해주(海州)에서 나와 문적(文籍)에 나타난 것이 고려(高麗)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의 감(監)인 휘 인유(仁裕)에서부터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다가 증조(曾祖) 휘 정방(定邦)이 무과로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장차 모후(母后)를 폐지하려고 백관(百官)을 협박하여 의논을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부(武夫)인지라 다만 사략(史略) 초권(初卷)을 읽어 精進할뿐 간특한데 이르지 않는다는 한 구절만 읽었습니다』하니 듣는사람이 장하게 여겼다.

조(祖)의 휘는 사겸(士謙)인데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로 좌찬성(左?成)에 추증되었고 효도로써 소문이 났다.

고(考)의 휘는 숙(?)이니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였고 좌찬성(左?成)으로 추증된 호 천파(天坡)이다. 문장과 정사(政事)로 현달(顯達)하였으나 일찍 돌아가시어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비(?)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니 병조참판(兵曹?判) 휘 성길(成吉)의 따님이다. 생가 아버지의 휘는 상(翔)이니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운수가 기이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가 늦게서야 음사(陰仕)로 나아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그쳤다.

공이 인조(仁祖) 이년(天啓, 甲子, 一六二四) 구월 삼십일 신사(辛巳)에 태어났다. 이해에 천파공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려고 할 때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바닷 길이 매우 위험하니 돌아올 기약을 점칠 수 없다. 만약 제수씨가 아들을 낳으면 취하여 아들로 삼아라』

이윽고 공이 과연 출생하여 할머니가 곧 거두어 길렀다. 어렸을 때 총명하고 영민하여 재주가 뛰어나고도 단정신중 하였다. 모든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치기를 좋아하지않고 항상 어른 곁에서 시중을 들며 훈계에 복종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이로써 재주와 도량이 일찍 이루어지고 문장과 학문이 빨리 성취되었다. 나이 열살에 천파공을 쫓아 해서(海西)의 감영(監營)에 있었는데 조사(詔使)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왔다. 천파공이 국경에서 영접하고 위로할 때 공이 따라가서 구경을 하였다. 정공(程公)이 이상하다고 여겨 눈여겨보다가 불러서 나오게하여 운자(韻字)를 불러주고 시(詩)를 지으라고 했다. 공이 붓을 당겨 다음과 같이 썼다.

    아름다운 하남(河南)사람

    동쪽에 와서 성군(聖君)에 보답하네.

    이로써 오신 정공을 알지는 못하나

    오히려 이장군(李將軍)보다 나으리라.

정공이 크게 경탄하고 곧바로 그 운으로 화답(和答)하였고 그 시는 모두 황화집(皇華集)에 실려있다. 정공이 아름다운 폐백(幣帛)과 문방(文房)의 좋은 물건을 보냈으나 공은 다만 붓 한자루만 받고 나머지는 다 사양하였다. 이에 정공이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고 천파공에게 『당신의 아들은 재상감이니 성취를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부탁 말을 하였다. 또한 가도(?島)에 돌아가서도 책과 노새 한 마리를 보내주었고, 글로써, 권면(勸勉)할 것을 말하였다. 이에 공의 이름이 한 세상을 움직이게 되었다.

다음해 천파공이 북방의 접대사신이 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松都)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이 달려가 곡을 하고 관을 안고 돌아왔다. 어리다고 해서 예의를 폐하지 않으니 벼슬아치들 중에 중도에서 조문한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기묘년(己卯年)에 할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무자년(戊子年)에 진사(進士) 선발에서 장원하고 드디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기축년(己丑年) 봄에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대책(對策) 한 것이 사람들에게 많이 전해져 읽혔다. 예(例)에 의해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여러번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에 임명되었다.

효종(孝宗) 원년(元年)인 경인년(庚寅年)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때 사간(司諫) 장응일(張應一)이 임금의 뜻에 의한다고 핑계대면서 진언하는 뜻이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착한 무리들에게 화가 돌아가게 한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런데도 물리치지 않으면서 조정을 바르게 하고 간사한 무리의 싹을 막을 수 없다』

하면서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이 말이 비록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그 때 여론이 좋게 여겼다.

신묘년(辛卯年)에 영남에서 유학을 하는 선비들이 두 번이나 시험장을 문란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시험관을 명망있는 사람을 선택해서 보내야 인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의논하였다. 이에 병조랑(兵曹郞)으로부터 나가서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어 백성을 위로하고 깨우치는 한편, 따로 벌로써 다스리는 두 가지 방도를 다하니 과거장이 조용하였다.

다음 해 봄에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으로써 소환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면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짓는데 참여하였다. 정언(正言)과 지평(持平), 성균직강(成均直講),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이때에 명망있는 사람으로 전형(銓衡)과 추천을 맡은 자가 가볍고 망녕되어 사람들에게 피해를 잘 주는 자가 있었다. 공이 공공연하게 배척하니 그 사람 때문에 외지(外地)로 좌천되었다. 그 후에 이조(吏曹)에서 그 자를 도와 공을 내쳐서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지만 맑고 대쪽같이 법을 지켜 역로(驛路)가 숙연(肅然)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언(正言)으로 조정에 돌아왔다가 교체되어 해운판관(海軍判官)이 되었다. 배로 운반하다가 남는 곡식은 전례(前例)에 따라 사사로이 사용해도 되지만 한 되나 한 말도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다. 곧바로 사서(司書)로 옮겼다.

병신년(丙申年) 봄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각도에서 세조(稅租)를 급히 거두어 들여야 했고, 삼남(三南)에는 또한 영장(營將)을 두어 자주 군사훈련을 시켰으므로 백성이 매우 괴로웠다. 또 세자(世子)를 위해 궁전을 수리하려 했다. 공이 이러한 재앙으로 인해 상소를 올려 조목 조목 따져서 그 일을 말하고 또 미친말이라도 충성에서 나온말은 용납하여 용서해주고 수금된 죄인을 풀어 보냄으로써 경계하고 두려운 실상을 대비하자고 청 하였다. 또 동료와 함께 임금의 답에 응하여 글을 올려 세금을 거두는 것을 늦추어 줄 것과 형벌과 감옥 일을 용서해주며,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여러 공장(工匠)을 권려할 것 등을 청하였다. 이에 효종(孝宗)이 충성스러운 말과 곧은 의논이 크게 간관(諫官)의 모습을 얻었다고 하면서 칭찬과 격려를 하였다. 또한 이로써 묘당(廟堂)에 내려가 의논하도록 하니 묘당의 청함이 공의 글과 말처럼 되었다. 다시 하교(下敎)를 내려 심리(審理)하는 일은 내가 간관(諫官)의 뜻을 알지 못하겠노라고 하시니 공이 동료와 더불어 상소를 올려 그 허물을 책임졌다.

수 일 후에 임금이 간신(諫臣)을 부르라고 명을 내려 상대하여 허물을 인정하고 위로의 말로 하유(下諭)하셨다.

공이 곧 나아가 사례하고 거듭하여 시대의 폐단을 진술하고 다시 먼저번 글에서 지적한 것 같이 하였다. 또한 궁중의 말(馬)을 친히 임하여 훈련시키는 과실을 보라고 하였다. 이 또한 임금이 좋게 받아 들였다. 또 궁전의 수리를 그만 두라고 명령을 내리셨는데도, 관동(關東) 지방의 재목이 강 위에 쌓여있으니 마땅히 여러 고을 로 하여금 각기 스스로 팔아서 백성에게 보탬을 주라고 청 하였다. 임금이 또한 허락 하였다.

잠시 후 일로 임직이 바뀌어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 때 대사간 유공철(?公?)이 유도삼(柳道三) 및 대군(大君)의 말을 탄핵하면서 신하의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하고 파직(罷職)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이에 크게 노하여 하옥시키고 심문을 했다. 공이 이에 계장(啓狀)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을 받지 못했다. 유공(?公)이 이미 신문을 받고 귀양을 가는데 공이 또 한번 계장을 올려 말하였다.

『철(?)이 망발(妄發)했을 뿐인데 이미 엄중한 형벌을 입고 절도(絶島)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불행히도 가는 도중에 죽게 된다면 성덕(聖德)에 얼마나 누(累)가 되겠습니까?』

임금이 이에 크게 노하여 엄중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다시 관직을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사헌부(司憲府)의 신하들이 간쟁했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다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일로써 교체되었고, 얼마 후 병조(兵曹)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 정언(正言)으로 다시 옮겼는데 이 때 궁중의 노비가 형벌을 신문받다가 죽은 일이 생겼다. 내사(內司)에서 해당 관청의 관리들을 처벌하라고 청 하였다. 이에 공이 말 하였다. 『내관으로써 바로 해당 관리의 문책을 청하는 것은 조장할 수 없으니 내관을 벌해야 합니다』이에 임금이 그 말을 쫓았다.

정유년(丁酉年) 봄에 장령(掌令)에 배수 되었는데 이 때 무리배들이 무리를 지어 칼을 차고 싸워 어지러우니 민가에서 고통스러워 했다. 공이 관리를 시켜 체포하려 했는데 왕손(王孫)집의 노비가 또한 그 안에 있었다. 숨기고 나오지 않으면서 공에게 자주 부탁을 했다. 공은 그래도 체포할 것을 독촉하여 그만 두지 않았다. 얼마 후 공이 지평(持平)인 민유중(閔維重)과 함께 조정에서 퇴청하였는데 민공의 마부가 누구에게 심하게 맞아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이를 보고 왕손의 집 노비가 공의 마부를 상해하여 유감을 갚으려다 엉뚱하게 된 것임을 알고 곧 민공과 함께 관청에 앉아 신속히 체포하여 심문하고 마침내 장매 아래 죽였다. 왕손이 화를 내어 종부시(宗簿寺)에 헐뜯고 호소 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공과 민공을 아울러 교체시켰다가 승지의 말을 듣고 예전대로 하였다. 공이 민공과 함께 관청으로 나아가 일의 시종(始終)을 진술하고 다시 임금께 보고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 왕손의 죄를 의논하고 배척하니 임금이 크게노했다. 이에 공과 민공이 다시 벼슬에서 체임되었다.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서로 이어 말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고 함께 외직으로 나갈 것으로 명령이 내려졌다. 공은 북청(北靑) 판관(判官)이 되고 민공은 경성(鏡城)으로 갔다. 승정원(承政院)과 옥당(玉堂), 사헌부 사간원에서 힘써 간 하였으나 윤허(允許)되지 않았다. 공이 그 날로 벼슬자리에 부임하여 좌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서 직무와 상관을 받들었다. 또한 법도에 맞게 아전과 백성을 다스렸다. 가을에 휴가를 청하여 서울에 돌아왔는데 주부공(主簿公)의 상(喪)을 당했다.

기해년(己亥年)에 상제(喪制)가 끝남에 헌답장령(獻納掌令)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었고, 효종실록(孝宗實錄)을 편수(編修)하는데 참여 하였다. 봉양을 위해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곧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신축년(辛丑年)에 벼슬을 받아 헌답(獻納)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상소를 올려 몸을 닦고 반성하여 절약 검소하는 도리를 말하여 가상하다는 비차(批?)를 받았다. 가을에 종묘에 위패를 모신 곳에 예를 마치고 동료와 함께 글을 올려 깊이 효도하는 뜻을 진술하고, 거듭하여 학문의 법도와, 어진이를 예우(禮遇)하는 도리를 말하였으며, 다시 시대의 폐단 두어 가지를 진술하였는데 임금이 좋게 받아들였다.

이때에 세자의 존호(尊號)를 올리고, 중궁(中宮)을 책봉하는 행사에 친척들이 많이 궁궐에 함부로 들어왔다. 공이 이에 말하였다.

『宮中을 출입함에 스스로 제한된 규제가 있는데, 더욱이 큰 예를 치러야 할 경우를 당했으니 마땅히 엄하게 절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함부로 들어온 자들의 집안 어른들을 엄히 처벌해야 합니다』고청하니 공론(公論)이 좋게 여겼다.

교체되어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사성(司成)으로 옮기고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

다음 해 봄에 돌아오는 도중에서 연이어 사간(司諫)과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지제교(知製敎)에 선정되고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에 임명 되었다. 임금이 무관을 사열하고자 하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말 하였다.

『군인을 사열하는 행위는 비록 옛날 지방의 순수(巡守)를 겸하여 사냥하는 예를 모방한 것이긴 하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즐겁게 노는 도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읍니다. 비록 풍년이 들고 즐거움이 큰 날이라 할지라도 경계를 늦출 수 없고, 더구나 하늘의 노함이 그치지 않고 재앙의 피해가 자주 생겨 굶주림과 역병으로 죽는 사람이 줄을 잇는 지경이니 마땅히 아침 저녁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닦고 반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출입과 거동이나 쉬는 절차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이에 임금의 대답을 내린 비차(批?)가 후하고 넉넉했다.

겨울에 대신(臺臣) 곽제화(郭齊華)가 언사(言事)로 외직(外職)에 보직을 맡았다. 이에 양사(兩司)가 복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는 사임하고 내려감을 허락하였다. 간원(諫院)이 마침내 승지(承旨)를 탄핵하니 임금의 분노가 컸다. 비답(批答)의 말씀이 매우 엄중하였는데 공은 동료와 함께 잘못은 바로잡되 중요한 것은 기쁨과 분노를 조절하고 간쟁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에 귀결된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계묘년(癸卯年)에 집의(執義)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어사(御史)로 호남(湖南)의 모든 진군(鎭軍)의 실정을 살필 때, 도(道)의 관찰사가 사사로운 정을 두어, 전에 병기(兵器)에 관한 일로써 포상하여 계급을 올렸었는데 공에게 부탁하여 자기 땅으로 삼고자 하였다. 공이 읍에 도착해보니 황폐함이 도리어 더욱 심하였다. 이에 공은 곧 임금에게 보고하여 죄를 주었지만, 도백(道伯)의 불법적인 일은 알고 적발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조정으로 돌아오니 간신(諫臣)들이 공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공은 도백(道伯)의 허물을 추궁하지 못했다고하여 파면되었다. 여름에 벼슬하여 상의원(尙衣院)의 정(正)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옥당(玉堂)으로 옮져졌다.

을사년(乙巳年) 봄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때 능(陵)의 나무를 도벌(盜伐)한 자가 있어 의금부(義禁府)에서 능관(陵官)의 죄를 가볍게 처리하자고 의논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명령을 내려 유배를 시켰다. 의관(醫官) 윤후익(尹後益)이 기현(圻縣)을 맡고 있었는데 어사(御史)가 그 죄를 적발하여 유배에 해당한다고 보고 하였다. 임금이 벌금형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공이 말하였다.

『크고 작은 처벌은 각기 법률이 있는데 마음대로 높거나 낮게해서는 안됩니다. 해당 관청에서 보고한 것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한 것은 맡은 관청의 책임자의 체모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분노하여 엄한 가르침을 내려 벼슬을 바꾸었다. 삼사(三司)에서 간쟁(諫諍)했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조금 후 다시 사간(司諫)에 임명되고 다시 교리(校理)로 옮겨졌다.

병오년(丙午年)에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이 때 무지개가 나타나 변고의 징조를 보였다. 공이 상소문을 올려 지극하게 말하였다.

『재앙과 이변이 매우 심한데 상하(上下)가 편안함을 즐기고 정교(政敎)와 율령(律令)이 옛 것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먼저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책략을 기르고 보존하여 수성(修省)의 근본(根本)으로 삼고 조상들이 손님을 접대하고 방문하던 성실함을 법(法)받아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인정을 통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노비들에 대해 잘못된 기록으로 인해 가족과 이웃에 까지 피해가 미치니 지금 온 나라의 극심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빨리 사정(査正)하여 백성의 곤란을 풀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세자(世子)가 잔치를 베풀고 온천으로 행행(行幸)함이 비록 모두 부득이하다 할지라도 마땅이 일에 따라 덜고 줄여서 백성을 구휼해야 할 것입니다. 또 청하노니 옥에 오래 갇혀있던 사람을 풀어주고 언로(言路)를 열어 충성스런 무리가 오도록 하십시요』

반복하면서 간절이 수 백말을 하니 임금이 또한 훌륭하다고 여겨 비답(批答)을 내리고 추창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로 옥당(玉堂)으로 옮겨 임금을 모시면서 궐내 노비의 신공(身貢)의 번거롭고 중복된 폐단을 극론(極論)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 궁녀를 뽑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재앙을 만나고 두려움에 방이를 해야할 때에 안에 있는자들도 오히려 방출해야 하는데 하물며 더 보태어 뽑으려 하십니까?』

임금이 듣고 받아들였다.

정미년(丁未年) 봄에 청나라 사람이 우리가 약조(約條)를 위반했다고하여 사신을 보내 연고를 물었다. 이에 임금이 몸소 금(金)을 내어 속죄하는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를 올려 의논하여 대신(大臣)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당하지 않고서 임금으로하여금 욕을 받게 하는 것은 법에 의해 죄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모든 간관(諫官)을 귀양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정원에서 또 상주(上奏)하니 여러 승지(承旨)를 하옥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침 밤중이라 대궐안이 놀라고 소란스러웠다. 공이 숙직이였는데 글을 올려 간쟁(諫諍)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다음 날 또 동료들과 함께 청대(請對)하고 지극히 논하고 물러났다. 다시 글을 올려 말 하였다.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여론이 함께 고통스럽고 슬퍼하는 바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황폐함도 포용하는 도량과 홀로 보시는 밝음으로써 수족(手足)과 같은 신하를 염려하시고 큰 계략을 깊이 보존하소서, 막 질책하는 말이 떨어지자 스스로 이를 당하여 종내 벌금의 욕을 만나게 되었으되, 마치 마음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현께서 온 나라로써 법도로 삼으신 것이니 어찌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바 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간관(諫官)들이 의논한 것이 비록 일의 형편의 가부를 살피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본마음은 임금이 욕을 보신 것에 대해 격탕(激蕩)한 것입니다. 이러니 어찌 깊이 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무릇 성인의 분노는 사물로 인해 옮겨진 적이 없습니다. 대개 물건으로써 물건에 붙이는 것은 그 사이에 사사로운 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돌려서 서로 부딪치고 거스르게 되어 갑(甲)이 을(乙)로 옮겨지게 되면 어찌 사물이 옮겨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이미 합계(合啓)를 올린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에게 화를 내셨고 또 다시 거슬린 승지에게까지 미치였습니다. 또 박장원(朴長遠), 이단석(李端錫)같은 사람은 마음에 품은 바를 개진하고자 하였으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꺽어버리고 특히 물리쳐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엄한 말씀과 준엄한 벌이 전후에서 서로 이어지니 모두 화를 옮긴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본원(本源)을 함양하는 공에 있어서 미진한 것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바로 집의(執義)로 교체되었다. 또 여러 간신(諫臣)이 석방하도록 청 하였는데 말이 더욱 간절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겨울에 영령전(永寧殿)을 수리하는 일이 끝나자 공이 그 일을 보살핀 공로로 통정(通政)에 승진되어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 자주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을유년(乙酉年) 봄에 상소를 올려 실정을 말하여 한현(고을)을 얻어 모친을 봉양하고자 하였다. 또 스스로 공이 있어 마침내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광주는 호남의 큰 고을 인데, 공이 이르러 호족(豪族)을 억누르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정사가 맑고 일이 간편하니 관리와 백성이 편안히 여겼다. 더욱이 인재를 양육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고 달마다 읍(邑)의 자제를 모아 글을 짓는 것을 부과하였다. 공무가 끝나면 곧 몸소 향교(鄕校)에 이르러 경(經)과 사(史)를 강론(講論)하고 설파(說破)하니 얼마 지나지않아 그 광채가 볼만하였다.

신해년(辛亥年)에 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공의 다스림이 마침 세해 째 였는데 검약하고 절약하여 창고와 노적가리가 충실해 졌었다. 이에 이르러 창고와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백성이 굶을 걱정이 없어졌다. 또한 조치한 바는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폈다. 마을에서 명망있고 근간(根幹)이 되는 자가 일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관리들이 줄(旁緣)을 맺어 간악한 짓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경우가 없게 되었는데 조정의 명령이 군(郡)이나 현(縣)에서 유민(流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였다.

『어찌 사람이 구렁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 마을에 명을 내려 초막을 짓고 대접하여 먹고 마실 수 있게하니 온전하게 살아난 사람이 백(百)으로 헤아렸다. 도백(道伯)과 어사가 계속해서 좋게 보고하니 임금께 말을 하사받는 은전(恩典)이 있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마땅이 교체해야 하지만 백성의 원을 따라 이에 유임시켰다. 다음해 가을에 교체되어 돌아오려니 백성이 붙잡고 막으며 차마 놓지 못하니 수레로 이를 막았다. 마을의 장로(長老)들이 말하였다.

『공의 정사 업적은 백년 아득히 보아도 드물 것 입니다』

계축년(癸丑年)에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다시 교체되어 병조참지(兵曹?知)가 되었고 가을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갔다.

갑인년(甲寅年) 봄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숙종(肅宗) 병진년(丙辰年)에 상복을 벗고 병조참의(兵曹?議)에 임명되고 좌승지(左承旨) 겸 내의원(內醫院) 부제조(副提調)가 되었다. 명성대비(明聖大妃)가 병환을 앓아 여러 달 고생하다가 회복하자 항상 모시면서 약을 준비하는 수고를 하였고 이 때문에 가선(嘉善)으로 올라 동지중추(同知中樞) 겸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했고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에 생가(生家)의 계비(繼妃)인 이부인(李夫人)상을 당했다.

기미년(己未年)에 호조(?曹)와 형조(刑曹)에서 참판(?判)을 역임하고 가을에 부진하사(副進賀使)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는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경신년(庚申年)에 특별히 호조참판(?曹?判)에 임명되었고 여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이때 역견(逆堅)이 반역하였다가 처벌을 맡아 심문하고 옥사(獄事)를 한 공로로 가의(嘉義)애 승진되였고 도승지(都承旨) 병조참판(兵曹?判)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가운데 아들인 태주(泰周)가 현종대왕(顯宗大王)의 따님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어 해창위(海昌尉)가 되었다.

신유년(辛酉年)에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병조(兵曹)에서 참판(?判)을 역임하다가 동지의금부(同知義禁府) 부총관(副摠管)을 겸직하였다.

임술년(壬成年) 봄에 병조(兵曹)에서 나가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니, 경기영문은 이 때 쇠잔하고 피폐함이 심하여 종과 병사는 겨우 몇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공이 이에 말하였다.

『만일 병란(兵亂)이 있으면 장차 무슨 방법으로 모든 수자리에 명령을 내릴고?』

하고 사람을 모집하여 영문의 군졸로 삼고 그 역할을 간소히 하며 세금을 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모여든 사람이 수 백인 이었다. 이들로 하여금 번갈아 쉬며 지시를 듣게하니 경기 영문이 지금까지 그 힘을 입고 있다.

계해년(癸亥年)에 일로 인해 교체되어 바로 도승지(都承旨) 호조참판(?曹?判)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특별히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갑자년(甲子年) 봄에 나가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가 감사와 틈이 생겨 체임되었다.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상(喪)에 산릉(山陵)을 감독하고, 윗 일이 완전히 끝나자 정헌(正憲)에 올라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명되었다. 사무처리를 공정히하여 청탁이 없었다. 이에 지의금(知義禁)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병인년(丙寅年) 겨울에 평안도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어 관서(關西) 지방을 겸하여 다스렸다. 음식물과 화물이 쌓여 일이 바빳는데, 공은 이미 나이 예순을 넘었지만 날마다 관아에 앉아 정사를 듣고 작고 큰 일을 친히 하였다. 녹봉 이외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으니 서녘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청렴결백함을 칭찬하고 있다.

다음해 여름에 명안공주(明安公主)가 돌아가시자 임금의 특명으로 돌아와 상을 맡아보게 되었고 나중에 지중추(知中樞)로 교체 되었다.

을사년(乙巳年) 정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삼월에 지의금(知義禁)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방인이 정권을 잡아 계속 큰 옥사가 있어 매일 신문하여 다스리는 일로 급했다. 정승이 공이 즉시 임명된 자리에 나가지 않는다고하여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명패(命牌)로 세 번이나 불렀지만 공이 병을 칭하며 부임하지않자 하급관으로 삭직(削職)하였다. 공은 나라일이 날로 피폐해짐을 보고는 문을 닫아 걸고 깊숙이 은거하면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사월에 중궁(中宮)인 민비(閔妃:仁顯王后)를 폐하려고하자 공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내가 옛날에 조정에서 넉넉하고 큰 은혜를 받아, 지위가 판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제 국사가 이에 이르니 죄로 물러남을 해명으로 삼아 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손수 편지를 써 뜻을 같이하고 벼슬을 그만둔 몇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평시서(平市署:관청)에 모였다. 이에 현직에 있는 호조판서(?曹判書) 이세화(李世華)공이 강상(江上)으로부터 기약없이 왔고, 전(前)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공이 또한 모든 명사(名士)들과 상소를 올릴 것을 계획하다가 평상서에 공이 있음을 듣고 이르니 도착한 사람이 무려 八○ 여 인 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의 처지가 다른 사람과 다르므로 상소문 머리에 이름을 넣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자제들도 울면서 그렇게 청하였으나 공이 마침내 듣지 않았다. 모든 명사가 상소문의 초안을 상의할 때 어떤 사람은 문자가 지나치면 무익하고 해롭다고하니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죽은들 무엇을 걱정하겠느냐고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고 날이 저물도록 임금의 회답이 내리지 않았다. 공이 대궐밖에서 명령을 기다리는데 이 공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비록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 있거나 산직(散職)에 있지만 八○명이나 되니 하나의 바깥에 있는 조정이라 할만 합니다. 한번의 상소로 그칠 것이 아니라 청을 들어줄 때까지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공이 미소를 지으면서『공의 말대로 미치지 못한 결과가 혹 생길까 걱정됩니다』고하였다.

얼마 후 임금이 과연 진노하여 직접 취조하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마침 시각이 열시 경이였는데 공이 이공, 박공과 함께 신문을 받으러 들어갔다. 공의 나이가 예순 여섯이어서 쇠잔하고 병이 있는데다가 몸까지 약했다. 자못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아 주위 사람이 모두 걱정 하였다. 그러나 공의 행동은 화평하고 평상시와 같이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미 임금의 위엄이 더욱 진동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잠잠히 할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이 들어와서 공의 상소가 흉칙하고 참혹하다고 말 하였다. 공이 고문과 형벌을 특수하게 받았지만 몸 동작이나 말 대답이 조용하고 사리에 조금도 어긋 남이 없었다.

다음날 사형에서 감해져서 의주(義州)로 귀양을 보내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공이 이 때 고문의 상처로 병이 심하였으나 오히려 강하게 참았다. 처음 옥에서 나올때 서울 선비나 아낙네들이 길을 메우며 요란스럽게 다투면서 공의 얼굴을 보려고하였다. 그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었고,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우사 늙은 영감님의 안색이 자못 평상시와 같으니 부디 아무 탈이 없기를 바랍니다』고까지 말하였다. 날이 저물어 서울 바깥에 있는 민가에서 자려고 하였는데 벼슬아치 중에서 점잖은이들이 알든 모르던 모두 서로 다투어 몰려와 안부를 물었다. 공이 지체없이 접견하려하자 아들 둘이 가만히 누워서 편안히 있어야 치료가 된다고 청하자 공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곧 죽을 사람이니 아는 친구와 더불어 얼굴을 보고 작별하고자 함이다』

들것에 실려 파주(坡州)에 도착하니 병이 악화되어 一六八九年(己巳) 五월 七일 여관집에서 돌아가셨다. 七월에 양성(陽城)의 서쪽 천덕산(天德山) 선영(先塋)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박공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는데 공보다 이틀 전에 도중인 한강 남쪽에서 돌아가셨다. 얼마 후 신하들의 진정으로 인해 모두 복직(復職)되었다.

그후 六년 뒤인 갑술년(甲戌年)에 임금이 크게 과거를 후회하고 다시 중궁을 복위시키며 곧 벼슬아치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유생(儒生)의 말로 인하여 하교(下敎)하여 충절(忠節)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한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관직을 전례에 따라 내렸다. 거듭하여 정려문(族閭門)을 세우라고 명을 내렸다.

파주(坡州)와 양성(陽城)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파주에는 박공(朴公)과 함께 모셨다.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와 북청(北靑)의 노덕서원(老德書院)이 또한 모두 공의 제사를 지내도록 되었다. 이에 성인이신 임금의 절개를 숭상하는 은전과, 많은 선비들이 의리를 사모하는 정성이 모두 유감이 없게 되었다.

공의 키는 작지만 뚱뚱했다. 수염이 아름답고 사람됨이 온순하고 단아(端雅)하면서도 곧고 굳세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독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五○년을 섬겼다. 일찍이 조금도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늙은 뒤에 중부(仲父)인 지사공(知事公:肅憲公)을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섬겼다. 날마다 반드시 몸소 가서 절하고 문안을 드리며 유고가 있으면 반드시 손수 글을 써 형편을 물었다.

조그만 맛있는 고기가 생기면 반드시 먼저 올려 맛보게 하였다. 과부가 된 자씨(姉氏)가 의지할 곳이 없자 그 자녀를 부양하고 일을 돌보아 주었다. 일가나 친척이 가난하고 곤란을 겪으면 극진하게 구휼 하였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공에게 서밥을 먹는 사람이 항상 십 수인 이었고 그 사람들을 차별이나 내색없이 공손스럽게 접대하였다. 또 음악에 동요되거나 구차하게 남을 추종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과 더불어 조정의 옛 법도나 선인(先人)의 좋은 일을 종일 말씀하셨고 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거동에 꾸미거나 위엄을 부리려 하지않고 안으로 마음을 확실히 지켜 주색(酒色)에 실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한번도 생산(生産)이나 재산의 이익같은 것을 묻지 않았다. 여러번 이름난 고을이나 큰 읍을 다스렸지만 음식을 기름지게 하지 않았다. 혼상(婚喪)의 선물을 보냄이 조금이라도 정도에 지나치면 받지 않았다. 사귀며 더부는 교제 간략하여, 비록 평소에 친한 사람도 높게 되면 그 집에 출입하지 않았다. 도리어 혼자 고요히 앉아 있기를 좋아하였다. 방 하나를 청소하여 발을 친 다락에서 책상에 기대어 눈을 감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니 사람이 있는 줄 모르게 하는 것 같았다.

내외(內外) 관직을 거치면서 법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지켜 사람들이 사사로움으로 간여하지 못하였다.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때는 살릴 수 있도록 구해서 하였으며, 작은 죄를 처벌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하여 뒷 말이 없었다.

공이 이미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가 청직(淸職)과 현직(顯職)을 역임하면서도 겸손 근검하여 마치 고요히 물러앉아 잘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삼사(三司)에 근무할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一○여 년을 남을 구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또한 격분하여 탄핵을 사납게 하는 것을 능사로 알지않고, 편당이 나라를 그르친 것을 싫어하여 항상 굳게 스스로 지켰고, 논의를 올렸다. 하면서 명성을 세워 높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의논을 쥔 자들이 이 때문에 공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비단옷을 입고 옥관자를 찰 자리에 여러번 있었지만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늙어서 왕실과 혼인으로 친척이되었지만 스스로 양보하였고, 당시 조정의 의논을 막연히 듣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몸과 마음은 한가하고 태평스럽게 가져 이로써 늙고자 하였다.

국가의 큰 변고가 생기자 공은 우두머리로 일어서 형벌이 앞에 있어도 용감히 주저하지 않았고, 마침내 한번 죽음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표상하였으며 사람의 기강을 잡았다. 이에 좋은 명성이 백세에 미치게 되었으니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진실성이 없고는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 아 어질도다.

공이 글 보기를 좋아하여 모든 경서(經書)에 더욱 숙달하고 늙어서는 자제를 가르치면서도 종종 글을 외우는데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깨끗한 마음으로 문장과 글씨로써 자기의 가치와 능력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평소 사람들과 주고 받은 글이 적은 까닭에 돌아가신 후에 시와 문이 남아있는 것이 적었다.

공의 첫 부인은 여흥민씨(驪興閔氏) 호조판서(?曹判書) 숙민공(肅敏公) 성휘(聖徽)의 따님이다. 아들 관주(觀周)는 생원(生員)으로 재주와 행실이 친구들사이에서 특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따님은 판관(判官) 남택하(南宅夏)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원주김씨(原州金氏) 학생(學生) 숭문(崇文)의 따님이다. 아들은 정주(鼎周)인데 감역(監役)이다.

딸은 일찍 죽었다. 셋째 부인은 상주황씨(尙州黃氏) 부사(府使) 연(?)의 따님이다. 아들은 태주(泰周), 진주(晋周), 이주(履周)이다.

따님은 참봉(?奉) 김창열(金昌說)과 검열(檢閔) 최창대(崔昌大), 김영행(金令行), 이재(李縡)에게 각기 시집갔다.

남택하(南宅夏)는 二남을 두었는데 도규(道揆)와 도진(道振)이며 딸은 하나로 민승수(閔承洙)에게 시집갔다. 김창열(金昌說)은 二남 一녀이며, 김영행(金令行)은 二녀 인데 모두 어리다.

나는 늦게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면서, 공이 재상(宰相)과 요직(要職)을 거치면서 말이 공손하고 뜻이 겸손하여 사람의 윗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것을 보고 마음 간절이 공경하였지만 친숙하지는 못했다.

공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함에 있어서는 비록 용감했다는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더 지날 것이 없다.

이에 더욱 공이 평소에 스스로 겸허한 것에 미치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이제 도위공(都尉公)인 태주(泰周)가 나에게 봉상시(奉常寺)의 관청인 태상(太常)에 시호(諡號)를 내릴 장(狀)을 써달라고 부탁 하였다.

내가 이미 사양할 수 없고, 공의 일에 까지 나의 이름을 올릴 수 있음을 기뻐하여, 삼가 공에 대해 아는 것과 공이 외우던 말을 얻어 장(狀)을 위와 같이 쓴다. 공경스런 마음으로 일을 맡은 분에게 고한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세자(世子) 우부빈객(右副賓客) 이여(李?)는 근장(謹狀)함.

提學 李?지음




忠孝公諱命恒行狀
(충효공 휘 명항 행장)

海恩府院君右議政吳公以戊申九月九日捐?舍同年十一月禮葬于龍仁先塋甲坐之原治命也公行孚于家功在於國宜有墓道之刻以詔無窮公弟副學君命新著爲家傳授顯命使之撰次爲狀以備立言者裁擇嗚呼顯命於公爲故人稚弟平生受眷知己深又??在幕佐奉以周旋於安竹之後旣又蠅附於????之末雖不文義可得以辭乎謹按首陽吳氏系出高麗軍器監仁裕十四傳而有諱允謙師事牛溪成先生渾以經術佐仁祖中興之治官領議政諡忠貞公世稱楸灘先生寔爲公高祖也曾祖諱達天官典籤贈吏曹判書祖諱道隆隱德不仕贈左?成考諱遂良贈領議政海興府院君生四五歲綴詩句稱神童二十五擢文科庭試以試題前出榜罷仍廢擧而終配贈貞敬夫人咸陽呂氏高麗大將軍林淸之後領議政諱聖齊女以我顯宗大王十四年癸丑四月十四日申時生公于漢陽南部政丞契寓舍生時呂夫人夢彩鳳啣?尺八室幼而岐?孝順若天成庚申逆變夜吹角聚兵城中洶?欲避亂公方八歲泣而告呂夫人請背負神主以從一家奇之十四五己誦四書二經賦邊馬詩曰北邊征馬有歸心大戰初還瀚海陰何日掃平驕虜盡華山春草復相尋識者稱賞以爲遠大器壬申丁議政公憂制?以呂夫人志勉爲擧子業時士子?喜朋游庠序間煽黨議釣聲譽公獨退然口不言時論士友鮮有知者顧倜?有大志不事家人産業年三十只一破硯爲長物或譏之則笑曰欲爲富家翁是不難耳甲申七夕肅宗大王命試士泮宮得公爲首遂以特命賜第公將赴試夢有人主引少主顧托云直赴乙酉式年丙戌隷槐院拜待講院兼說書曠選也敷陳文義裨益弘多賓師諸公噴稱爲第一宮僚始除有不悅者欲駁論及聞公講說不敢發三年三遞而三拜之公議欲其久也戊子陞司書移持平月餘?弘錄直拜校理所以待峻望也時爲王子營第議永安尉舊宅公上疏論之有曰殿下爲兩王子作室則苟安可也何必廣占甲第以長逸欲置産則足用可也何必諸處折授與民爭利乎士論多之每待講討論經旨外國計民憂邊備戎機指陳得失動輒百千萬言上必嘉納之己丑拜獻納請毁近京尼舍庚寅拜北評事還拜修撰移銓郞乞養除龍岡縣令前令燒失火藥甚多公力爲拮据充之修軍器團束吏奴以時鍊習優賞以勸之?輯縣中故事爲邑?其在官未十朔也後十六年顯命宰是邑邑人輒稱吳等時例旗?器機皆公之餘也辛卯還拜校理壬辰以科獄朝議益乖張公疏論闕門開閉以鹿馬變形爲言而時人亦不敢顯斥之冬陞應敎移執義皆不應命癸巳春論新錄不公時論大?枳望數月夏拜掌樂正移校理舍人又移應敎甲午再乞養得安岳安武鄕也捐官用立養士庫以待諸生又以錢?立一庫補民役安民至今賴之乙未還拜應敎論銓曹用舍不公又論良役偏苦言甚切上嘉納之冬擢拜銀臺丙申移?曹?議又移承旨仍拜慶尙監司不赴時一番人方用事以文字誣美村尹公士論大激欲上搢紳疏卞之公以搢疏體重難之疏事旣集而施己人多憤?公無動也自是累拜諸曹?議皆不應命丁酉秋拜廣州府尹廣保障地而事多頹廢不擧公至皆經紀而新之兵糧十萬斛皆入逋欠公按簿嚴督府庫立盈豪右造謗如山不恤也設軍需庫積千斛米以時?散又儲?城中九寺百餘斛以備緩急戊戌移拜江原監司守禦使白上請仍上特允之且曰某有老母予己慮之矣未幾辭遞後有繡衣過境歸語人曰在路多聞謗?細訊之皆關防要務某殆過人乎秋以兵議出拜靈光不赴己亥春復除嶺南伯兼均田使嶺俗喜訟文牒日雲委公剖?如流得漏結數萬國用賴裕民亦稱平焉有七山城皆稱關防而守備甚疎虞先爲造置火器各儲萬餘貫錢營門防納取剩貽害於民者盡革之時呂夫人先已還京患疾濱危上以標信宣傳官馳?別諭使之先交龜歸待特恩也公還翌日呂夫人下世比外除爲壬寅虎龍獄發一鏡弼夢?方?張公已??有胥溺憂雖間應除命如銓佐國子一切淸要輒不赴入對請仍鄭齊斗吏曹?判所以沮賊鏡復八銓也遂爲其黨所擊去及弼夢八銓差虎龍所援以爲勸&KK0134;逆節者爲騎郞公引春澤重爀事峻斥之於是鏡夢?愈不悅排?甚力公不樂在朝以匹馬東遊上毗盧絶頂遍觀三日浦五臺山而歸夏擢拜關西伯公常患國家升平久戎備多弛前後任州藩銳意修繕至是以西地邊胡先審關?形便如?島身彌島亦皆越海周覽爲之圖?以上山川險夷道里遠近民物粮械多寡開卷?然今皆在籌司又以無兵不可以守簡諸山城堞卒徵布爲營需者?布汰冗敎鍊以法又以財?不敷無以備不時需立別餉庫積米屢萬斛餘皆分儲?海諸邑銀錢布亦稱之後度支經用告?多取此爲賴云甲辰當?新?位不次擢拜?曹判書公防塞吏胥奸竇樽節宮掖?費時?飢又當國哀支費無?而應之裕如也盖公長於理財龍岡人常言公始至官庫?然未數月錢米如流云仍兼守禦使籌司有司堂上知經筵春秋主管北漢以知義禁?鞫一鏡上夜遣中官監杖痕自是公不肯赴鞫違七召得?後以非誠信待下陳戒乙巳春朝廷有大進退公?居龍仁墓廬累辭?度支及守禦使孝章世子丹禮時公入?賀班陳章而歸批曰昨於賀班依?見卿心深欣悅上意眷注盖不以進退有間也始壬寅獄主時議者藉以逞憤殺戮多濫及是時?新得志則又務欲快?怨肆然指逼先王爲?案張本有相臣進袖?秘甚而傳說??公從縣道封疏?曰右相密?雖不得其詳左領相?繼至而事乃彰露矣前代史牒國朝故事母論寃不寃?獄者何限而忍以先王疾有無斯蔽等語直請告宗廟頒示中外者有之乎深留睿思以絶後世之譏議焉時?交章請竄上不從自是築室山下栽花竹鑿池引流養魚植蓮讀周易誦出師表逍遙偃仰若將終焉丙午春聞徵夏投章斥?先王無人臣禮輿疾入城爲搢紳疏請正徵夏之罪又上引罪疏?曰臣於向日衷誠有以自結於上心義理有以素明於一世則今日紛紛者豈敢至此先儒不云乎子之?父者先有?父之罪不必復問其所?之事也臣之?君者先有?君之罪不必復問其所?之事也臣早得以此義理熟陳於??之下則今日處分之罪名?恐不在於起?妄言也仲由一布衣耳惡聲不及其師今悖說四起直犯至尊是則祿之千鍾不如一束修此皆臣罪也其言甚悲?以有禁令不得徹而時議?嫉益甚又發遠竄啓不得?丁未七月上黜一番人更張聖化首拜公吏曹判書公陳疏控辭上特遣備局郞促之公入對請採聽輿論明?義理以爲蕩平之本上嘉之及與大臣在上前論?辛丑諸臣之罪務從嚴峻斥兩司言議苟且者盖公性質直有見不自回也未幾擢拜判義禁公持論不與時俯仰壬癸間旣不合於朝?於外及是秉銓力引壬癸人輒以報復爲戎名論者雖爭之然未?不服其德量也旣而有?之者公遂乞解銓柄屢疏得?旋又拜兵曹判書戊申三月盜發畿湖先是肅宗大王甲戌仁顯王后再正中壺己巳凶?廢錮者數家失志三十年陰蓄異圖求有以逞之及是與鏡虎餘黨互相和附謀爲不?奉朝賀崔奎瑞耆舊臣也知其幾一夜馳百餘里上急變公與諸大臣入對請戒嚴設庭鞫命巡討使金重器出鎭水原重器請待長湍兵至公曰郭子儀以十三騎入吐蕃軍周亞夫行收兵至洛陽吳楚破膽重器言非矣重器兵旣出都下益?懼公請不閉城門以鎭人心又請下哀痛詔?榜通衢賊捕納其黨者重賞之以解散賊謀上皆從之公又以嶺南爲憂請擢御史朴文秀爲監司上是其言時鞫招狼藉魁渠多世祿士夫族大而富厚者或家養兵或連結士賊京畿兩湖嶺南四路相應將約日犯闕平安兵使思晟以智?名亦與焉旣而賊夜劫成歡驛奪人馬去察訪姜栢詐稱母死披髮走報至上夜御帳殿有憂色顧待臣曰重器老將恐誤事奈何公進曰古人云主辱臣死臣雖不才忠憤白激老將不能振若坐失事機國其奚爲臣請自?坑之?議以本兵長不可遠出難之公曰領議政李光佐兼本兵可以集事矣上曰兵判慷慨自當不可尼也?命拜公京畿忠淸全羅慶尙四道都巡撫使以李光佐兼行兵曹事光佐下庭免冠固辭公適出聞??入手擧帽加之?聲責曰此何時敢辭職爲乎光佐憮然遂膺命公請以朴文秀爲從事上許之仍曰兵判出征予於畿湖無憂矣賜太?馬又命賜尙方劍曰此宋祖授劍意也中軍以下以此從事公曰臣不自量妄請重任殿下察臣愚忠使得效力旣以四路委臣監司以下不用命者將若何上曰亦惟賜劍在耳公曰今日財窮最急願殿下以大布大帛爲心上曰唯卿言公曰逆節窮凶宜殄滅無遺然願殿下欽恤上曰唯卿言仍下弓箭椒藥又曰卿之營中豈曰無甲胄而予當追送着之戰陣可也賜酒饌公擧觴拜曰臣無酒量此酒不敢不?又當退而與軍校共醉君賜矣又曰連日?鞫勞動玉體願殿下保重心無動然後可以有思而得矣上?之十八日戊辰率馬?二千兵發京師次果川己巳次水原賊已以十六日夜劫淸州城殺兵使李鳳祥營將南延年據上黨粮械時不用兵且百年將士涕泣赴伍行不百里已?乏不前及淸州報至益驚擾不能?公?以嘯聚不足慮曉?之?情稍安遂於馬上?狀草馳啓曰臣欲直向淸州與監司合兵?滅但念利川竹山兩路無備恐賊乘虛臣已令竹山府使崔必蕃進?請以守禦摠戎兵助之臣念京城宿衛單弱使果川縣監權聖徵率安山陽川衿川果川四邑兵渡露梁津陣敎場聽朝廷指揮聖徵軍?不時渡江都民易繹騷請先?津將整舟楫以待城中恐有奸細?伏請令漢城府如痘疫摘奸盡行?捕賊若從上遊順流以下則東郊最虛宜有備也平安監營有二萬作隊軍又有別武士頗精銳折其半宜使入覲西邊亦重地其餘宜使留防也撤各津津船聚待一處上游宜只留龍津船以通關東營也朝廷多採施又狀請以顯命及李匡德李道謙爲從事官分管京畿全羅忠淸道事時顯命以巡討從事在金重器軍中仍從焉庚午次振威陣縣南野中初更邏卒來報有一騎將帶二?卒到陣前告曰義禁府假都事自平澤拿罪人去所領馬?兵多恐驚動大陣使人先報公令縛入問曰發兵者誰也曰縣監也是日朝平澤縣監柳重謙逃還待罪水原陣前故知其言許又其所佩筒箇有兵營識而抹之故疑爲淸州賊諜而其來必有計令軍中戒嚴以待旣而假都事請謁又令縛入乃武兼宣傳官金聲玉將士有知面者於是又疑其非賊欲令出忽陣後喊聲大起砲矢亂發人馬擾亂有數三白衣賊縱橫馳走陣中一卒挺?直犯將壇軍官申震??奪劍擊之仍獲賊諜八九人?聲玉斬之陣稍?令敎鍊官持令旗巡軍整行伍出暗令?捕又縛致數將將斬一賊奮身超拒馬木而走夜黑不能追後賊將李培就鞫自言爲刺客入都巡撫陣被縛而逸又有言賊擧事時謀先除兵判云盖賊混列邑粮草軍?入軍中平澤賊又隨聲玉來爲撓內掩外之計而未?然陣亂事急聲玉從賊情實未暇詰也始變起倉卒一軍震蕩顯命仗劍後至帳前公方憑?指麾如常顯命見甲胄在前以劍擊地曰使道欲以此走乎公笑曰從事怯耳命却之後語顯命曰趙從事無乃太慷慨乎顯命至今愧悚不已也公與從事等議進兵或欲直取淸州?死戰或欲據雙樹城從間諜散賊黨爲萬全計公但曰試進屯稷山更議未?也壬申進軍到素沙午飯訖前隊已趣稷山路公忽倚馬呼兩從事附耳語良久令安城郡守閔濟章曰還本郡整待粮草而揚言運致稷山大陣招塘報哨官執耳近前發暗令麾旗徑?安城始公到果川見旗卒方得?精悍可任陞別武士得其歡心密令投淸州探賊路得?獲賊諜粧?商者告賊自鎭川分兵約日出竹山出安城欲襲殺閔濟章公已欲入安城爲先人奪人之計而恐謀洩聲言向稷山大路在途又連得偵者四五輩言皆合故意益?抵安城日已昏陣成見前山擧火砲喊繼起候卒急報賊犯陣時風雨夜黑人馬不食者過半衆心遑遑公堅臥不動督運柴草燃火陣外四面?陣伍母輕發砲丸賊近始發設?粥饋士?睡如常陣中賴安翌朝見陣外百餘?有人馬中丸死者及米屑器械委棄者盖賊昏霧中以爲安城陣稍犯之見陣中放神機箭覺其爲京軍始驚怯多?散賊魁?佐與反賊宗元等退屯於郡南靑龍山茄之谷村中以待竹山兵至?我軍五里而我軍殊未覺也敎鍊官權喜學獲賊諜始知之公遙見其地阻三面中抱大村前臨平野令中軍朴?新分領馬?兵?擊之戒曰偃旗鼓疾?由山後先據高險張二翼放砲丸火箭燒之則賊必走出前野以馬軍蹴之且令軍官閔濟萬率安城軍爲疑兵以?賊走路?新違節度賊覺之張紅傘白旗陣山上官軍失地利不敢逼權喜學獲村?知賊將匿村中謂軍官李萬彬曰君非壯士耶見小敵怯何也萬彬慨然曰我其死之躍馬賈勇曰誰能從我者中哨軍趙泰先等五十餘人願從馳入村中反將宗元馬悍不受啣方遲回見官軍至嗟曰欲延晷刻命至此耳拔劍欲出泰先前?一丸中頸?萬彬下馬斬之又斬其軍官數人縣旗竿?而馳山上賊望見氣奪弓砲皆沾濕不可用遂走山頂官軍見賊陣亂奮力而上賊欲南走見濟萬兵又倦而西勢益蹙棄旗鼓四潰官軍追斬百餘人獲輜重紅傘始官軍仰攻賊在山上進退有誘引狀及賊與官軍俱捲下山後不知勝負從事等&KH3076;垓上望見慮官軍?賊計公笑曰賊無能爲矣日未午飛馬從南來報捷旣已?新整軍奏凱而還士馬?躍修捷書函宗元首馳報京師始賊夜犯陣中昏霧不辨咫尺顯命請放火箭燒邑村以爲明公不聽恐民物延燒也癸酉令軍中齎午飯發向竹山左右皆疊巒深谷及到獐項嶺下前軍報警公見嶺峻恐賊先據促令馬?軍數路?進賊馬軍數三哨在嶺底望見官軍大驚潰官軍自安城之捷氣方盛適西風從嶺上倒吹旗幟拂拂有聲賊大隊方陣野中盛?帳列旗鼓擊牛?酒望見官軍放砲麾旗而衆不應陣角微動官軍乘風馳下峻坂勢若崩山直抵竹山府前賊大潰官軍四面掩殺先擒僞副元帥鄭世胤僞竹山府使鄭繼胤斬之賊多投入避亂人中以自混公慮無辜被殺令曰生擒者賞?從者皆放還有村民縛巨魁?佐來獻?佐敗安城夜走山谷還到竹山而陣又潰與僞淸州牧使權瑞鳳僞鎭川縣監李之璟僞將軍睦涵敬等?匿見獲所持大元帥印如斗大從事及諸將校皆憤欲?殺公曰此賊當檻送京師具五刑誅之不聽時日已昏有白衣卒從山谷?來窺??佐自言忠州兵約會公令軍中戒嚴翌曉令曰斬?佐懸其頭旗上大書曰賊魁?佐實則他賊非?佐也遂以檻車?瑞鳳涵敬等馳獻京師令顯命草捷書有張大語公不悅遂口占數句但云臣領兵進竹山逆賊等望見旗鼓四散?走緣由馳啓啓至左議政趙泰億在上前歎曰都巡撫之不伐尤善矣所獲軍器馬匹米布無數朴文秀請悉以賞士卒公曰軍器驛馬不可擅給假差閔濟萬爲竹山府使使之收拾遣還各營邑民之流散者安集之賊之?匿者捕誅之發向淸州比至淸州將吏等已設機捕斬僞兵使申天永及其徒十八人州境肅淸公就哭李鳳祥南延年之屍入新兵使趙?軍中諭上意盡罷遣歸農▣聲如雷上聞捷音大悅手書志確功高四字仍以手札奬諭曰數日之內連上捷報可謂功耀一世名垂竹帛矣公在軍酬應百務不遑寢食或慮其疲勞請以細事委從事公不從日一巡陣雖士卒最下者必執手丁寧夜不處房室雨不被油衣每諭旨下輒悲憤涕泣一軍爲之感動將吏有罪?加誨責而已不鞭一人顯命諫曰不以威濟寬難以律衆公曰國家昇平久京軍素油猾遽以刑戮加之必有怨?離心者不如撫以恩意激以忠義得其死力之爲愈也因嬉笑曰吾用兵法李廣也公始至水原以從事檄召顯命顯命自巡討陣中馳謁時夜已深有軍吏前?曰軍中食矣公曰唯進飯顯命意其適然也其後日如之顯命自竹山先歸以承旨奉命迎勞露梁江上見公拜且起流汗坐而手??諦視之不改去時衣而天熱已久也公自淸州將班師?佐弟熊輔與嶺南人鄭希亮等又稱兵反安陰居昌三嘉陜川咸陽等邑皆?始公在安城馳檄嶺南以淸道郡守鄭錫範漆谷府使柳東茂差都副摠將率安東精砲進?秋風路錫範等兵未及發賊已起公聞變傳令三南監兵使指揮方?有旨令留鎭湖西旣又諭令進住湖嶺間指揮列鎭以寬南?憂公得旨?發由文義歷金山到秋風驛聞賊已平盖熊輔繼起嶺外欲與?佐表裡相應爲北犯之計及聞安竹之敗?首不食列鎭兵又左右?進賊益?而?爲麾下賊所縛星州牧使李普爀進逼陜川賊賊使軍校河世浩來桃戰且?虛實普爀出示安竹捷關世浩大?而歸擒賊自效於是湖嶺賊悉平出師?數十日不損顔行一卒四月乙酉自知禮歷巡居昌安陰咸陽招聚禁御軍之從賊者?官庭執朝廷諭旨流涕曰汝等蒙國家養育何爲從賊賴聖上不殺得保汝首領何面目仰見王人乎他日上?能不愧於心乎諸軍伏地涕泣左右觀者亦莫不流涕令軍中勿擾村閭諭士民安堵力耕如竹山己丑整軍踰入良峙至全州大?沿路民人爭以牛酒來迎皆謝不受初公未至安城臺臣申魯誣以逗留上嚴敎黜之陞辭時請於上曰思晟就拿無實?送臣軍上曰此時非卿必不作此語矣已而思晟以逆誅公惶恐到恩津馳啓乞以白衣胥命使中軍領還大軍?離軍先行星夜馳抵龍仁先塋上使宣傳官走馬回諭曰畿輔之平嶺捷之上悉卿之功惹?妄言何必深嫌伊日筵奏斷斷無他丹心可質神明卿其安心?日領軍登途用副日夕之望戊戌到露梁上遣承旨勞慰己亥公振旅還京士民傾城出迎見士卒暴露久衣甲凋弊??有流涕者上御崇禮門又命知申事勞問進露布訖公以金胄紅甲??賊魁首級上命懸竿仍命入侍上執公手曰掃蕩凶醜使宗社再安兩東朝嘉悅皆卿之功也公對曰此聖上威德臣何力之有仍引罪請退上曰知人聖人其難弼顯逆心予亦不知以末擬除泰仁卿何由知思晟乎又曰經入安城一着奇矣仍命與中軍別將侍衛入闕入侍宣政殿上曰卿之不伐功予固嘉之然鼎彛紀功國之典也公曰臣以三軍之帥曠日逗?有罪無功豈膺茂功乎臣祖故相臣某在仁祖朝力辭勳名臣恐無以歸見先祖也上曰非卿得有今日乎予但與金重萬?血乎重萬?亂初上變者也上命宣?曰都巡撫進前親酌大盃授之曰與中軍別將分飮仍命錄功爲元勳公力辭上敦勉益懇至曰予當以宋祖保全功臣之意待卿公不得已應命策輸忠竭誠?幾效力奮武功臣一等第一人海恩府院君特拜議政府左?成兼兵曺判書懇辭兵判又除摠戎使累辭不獲六月枚卜拜議政府右議政公旣策崇勳?又進?勻軸憂?不敢出會有急變上親鞫不得已出肅?鞫退言人臣可以久享此乎速死歸拜父母幸矣旣而臺臣鄭益河上疏軋公公??出東郊上遣承旨使與偕來又遣知申事敦勉批旨有曰予之倚仗乎卿者奚特棟樑也柱石也實股肱也國寶也又以手書敦諭公終不起偶感微恙十數日猝?易?于東湖寓舍上聞而震悼敎曰國之柱石國之心腹乃至於此耶欲望哭於城外群下爭之遂用世宗朝故事率百官擧哀于禁川橋上哭之慟左右侍者莫不泣下內賜御衣二襲錦段紬疋長生板又命地部買城門外近舍移殯遣近侍臨吊命服?官所後子特?副學君出彊之任使管襄葬親製文以祭之縷縷千餘言感動幽明隱卒之典於古無比云公早孤事呂夫人至孝家素?竭力供甘旨及貴俸祿及外方?遺皆以?呂夫人不一毫私畜在州郡供養極其豊盛施及兄弟?妹歲給財穀務以慰悅親心篤於奉先雖遠祖必躬展墓地置墓奴墓田竪石以表之以至窮族喪婚或以萬錢助之居呂夫人之喪哀慕如?兒廬於墓下朝夕拜哭雖大雨雪不廢?粥以終三年公年已五十居養素不薄患胃損幾殊親愛勸薑桂萬方終不聽形神毁脫脚?不能起見者爲之哀動時喪禮之乖久矣君子益賢之公旣卒有筵臣言於上請褒之上曰求忠臣必於孝子之門正謂此也命族其門又命太常先諡狀議諡曰忠孝後上駕過公閭語侍臣曰在家爲孝子在國爲忠臣奇哉公風姿魁岸奇骨滿面鬚髥蔚然論徵夏時公與諸卿宰會予伯氏大司諫第時廢退且三年索然若死灰之不可復燃然公每扶掖就坐雄渾崇深望之若大山巨壑衆皆充然如有恃也公不規規循俗不皎皎近名臨事有湍水赴壑之勇守志有萬牛難回之確方黨習日痼逡巡退避如?夫顧於國家緩急毅然舍生而?之盖其素蓄積者然也起自書生仗尙方劍專制四路蕩狂寇於方張奠國勢於旣危蔚爲干城柱石之佐不其偉歟今夫農者耕於野商旅行於塗士大夫早眠而晏起父母安於上妻子嬉於下嗚呼是誰之爲也及膺大拜首建良役變通之議節用阜財之策皆中興要務也百僚仰其儀刑萬姓望其惠澤而乃爲宵小?巧中席未煖而?斥以終悲夫公之家人有貿於市市人或不受價與之嗚呼彼其之人獨何心哉然挾不賞久於寵利非公志也固將買地湖上浩然爲長?之計進雖不肯展布經綸卒究霖雨之澤退亦可以闔門養威以增鼎呂之重顧天不假年使身無綠野一日之享國失猛虎衛藿之勢嗚呼慟矣公諱命恒字士常永慕庵名也得年五十六有女一人適士人韓德吉取副學君第二子彦耉爲子云

[譯解]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 우의정(右議政) 오공(吳公)이 무신(戊申) 九월 九일에 관사(?舍)에서 몰(歿)하여 같은 해 十一월에 용인(龍仁) 선영(先塋) 갑좌(甲坐) 언덕에 예장(禮葬) 했으니 이는 공의 생전의 명령이었다. 공은 행동이 집에 성실(誠實)했고 공이 나라에 있으니 마땅히 묘도(墓道)의 비석이 있어 앞으로 무궁하게 알려야 한다고 하여, 공의 아우 부학군(副學君) 명신(命新)이 가전(家傳)을 저술하여 현명(顯命)에게 주면서 행장(行狀)을 지어 이론을 세우는 자의 재택(裁擇)에 대비하려고 한다.

아아! 현명(顯命)은 공에게 친구의 어린 아우가 되어 평생에 은혜를 받고 나를 아는 것이 깊을 뿐 아니라, 또 더구나 막좌(幕佐)에 있으면서 안성(安城) 죽산(竹山) 싸움에 주선을 하여 이미 또 기린도(麒麟圖)의 끝에 붙었으니, 비록 글을 하지못하지만 의리에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수양오씨(首陽吳氏)는 계통이 고려(高麗) 군기감(軍器監) 인유(仁裕)에게서 나와서 대(代)를 전하여 휘(諱) 윤겸(允謙) 우계 성선생 혼(牛溪成先生渾)에게 사사(師事)하여 경술(經術)로 인조(仁祖)의 중흥(中興)의 다스림을 도와서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으로서, 세상에서 추탄선생(湫灘先生)이라고 일컬으니 실로 공의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달천(達天)이요, 벼슬은 전첨(典籤)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을 받았다. 조부의 휘는 도륭(道隆)이니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좌찬성(左?成)의 증직을 받았다. 아버님의 휘는 수량(遂良)이니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고 해흥부원군(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四~五세에 시구(詩句)를 지어 신동(神童)이란 이름을 들었고, 二十五세에 문과(文科) 정시(庭試)에 뽑혔으나 시제(試題)가 먼저 나왔다해서 방(榜)이 파해지자, 이로하여 과거를 폐하고 그대로 마쳤다.

부인은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함양여씨(咸陽呂氏) 고려 대장군(大將軍) 임청(林淸)의 후손이요 영의정(領議政) 휘 성제(聖齊)의 따님인데, 우리 현종(顯宗大王) 十四년 계축(癸丑) 四월 十四일 신시(申時)에 공을 한양남부(漢陽南部) 정승계 우사(政丞契寓舍)에서났다. 날 때 부인이 채색 봉(鳳)이 그림자(?尺)를 입에 물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효순(孝順)함이 천성(天性)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경신(庚申)에 역변(逆變)이 일어나 밤에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서 성중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난(亂)을 피하려 하는데, 이 때 공은 八세로서 울면서 여부인(呂夫人)께 고하여 신주(神主)를 지고 가기를 청하니, 온 집안이 기이하게 여겼다.

十四, 五세에 이미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외웠고, 변마시(邊馬詩)를 지어 말하기를, 「북쪽 변방에 가는 말이 돌아갈 마음이 있는데, 큰 싸움에서 처음 돌아오니 한해(澣海:큰바다)가 그늘지네. 어느날에 교만한 오랑캐를 다 쓸어버려서 화산(華山)의 봄풀이 다시 서로 찾게 할건가. <北邊征馬有歸心大戰初還澣海陰何日掃平驕虜盡華山春草復相尋>」하니, 아는 자들이 칭찬하여 원대(遠大)한 그릇이라고 했다.

임신(壬申)에 의정공(議政公)의 상사를 당했고, 복(服)이 끝나자 여부인(呂夫人)의 뜻으로 힘써 과거 공부를 했다. 이때 사자(士子)의 무리들이 벗들과 놀기를 좋아하여 상서(庠序)사이에 당의(黨議)를 선동(煽動)하여 남의 칭찬을 받고자 했는데 공은 홀로 물러서서 입으로 시론(時論)을 말하지 않아서 사우(士友)들이 아는 자가 드물었다.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어서 집의 산업(産業)을 일삼지않고 나이 三十에 다만 깨진 벼루 하나가 있어 이 것을 장물(長物)로 삼았다. 혹 이를 조소하면 웃으면서 말하기를, 「부가옹(富家翁)이 되려면 이는 어렵지 않다」고했다.

갑신(甲申) 칠석(七夕)에 숙종대왕(肅宗大王)이 명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선비들을 시험했는데 공이 우두머리가 되자 드디어 특명(特命)으로 집을 하사했다. 공이 장차 과거에 나가려 하는데 꿈에 어떤 임금이 어린 임금을 데리고 와서 부탁했다 한다.

바로 을유(乙酉)의 식년시(式年試)에 응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시강원(侍講院)의 설서(說書)가 되었으니 이는 드문 인선(人選)이었다. 이때 글 뜻을 부연해 아뢰어서 유익한 것이 많으니 빈사(賓師:빈객으로 대우받은 학자) 여러 공(公)들이 칭찬하여 제一로 삼았다. 궁료(宮僚)를 처음 임명할 때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어 공박하고자 한 자가 있었으나 공의 강설(講說)을 듣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三년 동안에 세 번 바뀌었으나 세 번 임명 되었으니, 이는 공의(公議)가 공을 오래있게 하고자 해서이다.

무자(戊子)에 사서(司書)에 승진되었다가 지평(持平)으로 옮겼고, 한 달이 지나서 홍문록(弘文錄)에 참여하고, 바로 교리(校理)에 임명 되었으니 이는 높은 인망을 기다린 것이다.

이때 왕자(王子)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는데 영안위(永安尉)의 옛집을 의논하자, 공은 소(疏)를 올려 이를 의논했으니 거기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두 왕자(王子)를 위하여 집을 지으시려면 진실로 편안하면 그만일 것 이온데, 어찌 반드시 널리 좋은 집을 점령하여 길이 안일(安逸)하게 하오며, 재산을 두고자하면 족히 쓰면 그만일 것 이온데 어찌 반드시 여러 곳에서 꺾어주어서 백성들과 이(利)를 다투게 하십니까?」하니, 사론(士論)이 이를 갸륵히 여겼다.

매양 시강(侍講)할 때는 경서(經書)의 뜻을 토론(討論)하는 이외에 나라의 계획과 백성들의 근심, 변방에 대비하는 병기(兵機)에 이르기까지 득실(得光)을 가리켜 아뢰어서 움직이면 문득 백 천 만언(百千萬言)을 말하니 임금이 반드시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기축(己丑)에 헌납(獻納)에 임명되자 서울 가까운 곳의 절을 헐기를 청했다. 경인(庚寅)에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었다가 돌아와서 수찬(修撰)에 임명되고 전랑(銓郞)으로 옮겨졌다. 이 때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용강현령(龍岡縣令)에 임명되었는데, 먼저 있던 현령(縣令)이 화약(火藥)을 소실(燒失)한 것이 몹시 많았었다. 이에 공은 힘껏 일해서 이것을 충당(充當)시키고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이노(吏奴)를 단속하여 때로 연습시키고 넉넉히 상을 주어 권면(勸勉)했다.

또 현(縣)안의 고사(故事)들을 수집(?輯)하여 읍규(邑規)를 만들었다. 공이 그 현(縣)에 있은지 十개월이 못되었는데 그 후 十六년에 현명(顯命)이 이 고을 현령(縣令)으로 나갔더니 고을 사람들이 문득 오모(吳某)의 시례(時例)를 말하니 기치(旗幟)와 기계(器械)가 모두 공이 만든 것이었다.

신묘(辛卯)에 도로 교리(校理)에 임명되었고, 임진(壬辰)에 과옥(科獄)으로 조정 의논이 더욱 괴이하게 벌어지자, 공은 소(疏)를 올려 대궐문을 열고 닫는데 사슴과 말로 모양을 변하자고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또한 감히 현저하게 배척하지 못했다.

겨울에 응교(應敎)에 승진되었다가 집의(執義)로 옮겨졌으나 모두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계사(癸巳)봄에 신록(新綠:새로 뽑은 사람)이 공정하지 못하다하여 당시 의논이 크게 시끄러워 두어 달 동안 계속 되었다. 여름에 장악정(掌樂正)에 임명되었다가 교리(校理), 사인(舍人)으로 옮겨지고, 또 응교(應敎)로 옮겨졌다.

갑오(甲午)에 다시 부모 봉양을 빌어서 안악(安岳)으로 나가게 되었다. 안악(安岳)은 무향(武鄕)인지라, 관청에서 쓸 것을 내어 양사고(養士庫)를 세워 이 것으로 제생(諸生)들을 대접했고, 또 돈과 곡식으로 창고 하나를 세워 민역(民役)과 안민(安民)을 도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힘 입는다.

을미(乙未)에 도로 응교(應敎)에 임명되어 전조(銓曹)의 사람을 쓰고 내보내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의논하고, 또 양역(良役)이 편벽되게 괴롭다고 말하여 말이 몹시 간절하자,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 들였다.

겨울에 발탁되어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갔다가 병신(丙申)에 호조참의(?曹?議)로 옮기고, 또 승지(承旨)로 옮겼다가 계속하여 경상감사(慶尙監司)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때 한쪽사람들이 바야흐로 용사(用事:권세를 마음대로 부림)하여, 문자(文子)를 가지고 미촌윤공(美村尹公)을 무함(誣陷)하여 사론(士論)이 크게 격렬해지자 진신소(搢紳疏)를 올려 이를 변명하고자 했으나 공은 진신(搢紳)이 체중(體重)하다고 하여 이를 어렵게 여겼으나 소(疏)에 대한 의논이 이미 모여지자 사람들이 헐뜯는 자가 많았으나 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러번 여러 조(曹)의 참의(?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명령에 응하지 않다가 정유(丁酉) 가을에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임명되어 널리 장지(障地)를 보존했으나 일이 퇴폐(頹廢)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많은 것을 공이 이르러 겨우 一기(紀)만에 이를 새롭게했다. 병량(兵糧) 十만 곡(斛)이 모두 포흠(逋欠:十二年)이 된 것을 공은 장부를 조사하여 이를 엄하게 감독하여 부고(府庫)를 그 자리에서 채워 놓았다. 이때 호우(豪右)들의 비방이 산과 같았지만 공은 이를 상관하지 않고, 군수고(軍需庫)를 설치하여 천곡(斛)의 쌀을 쌓아 때로 거두고 흩게 했으며, 또 성안에 있는 아홉의 절에 있는 백여곡(斛)을 모아서 급한 일에 대비하게 했다.

무술(戊戌)에 강원감사(江原監司)에 옮겨 임명 되었는데, 수어사(守禦使)가 임금께 아뢰어 그대로 두게 해달라고 청하자 임금은 특별히 이를 윤허하고, 또 말하기를, 「모(某)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어서 내 이미 이를 걱정하는 바이다.」했다. 얼마 안되어 벼슬을 사양해 바뀐 뒤에, 어떤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이 경계를 지나고 돌아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길에서는 그의 비방을 많이 들었으나 자세히 물어보니 모두 관방(關防:국방)의 요무(要務)였으니 모(某)는 자못 남에게 지나는 사람이로다」했다.

가을에 병조참의(兵曹?議)로서 영광(靈光)에 나가도록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기해(己亥) 봄에 다시 영남백(嶺南伯) 겸 균전사(均田使)에 임명되었다. 영남(嶺南)의 풍속은 송사(訟事)를 좋아하여, 문서가 날로 몰려들어 관청의 처결을 기다리는 데 이것을 물흐르듯이 해결하여 빠져있는 전결(田結) 수 만을 얻으니, 나라에서는 넉넉하게 썼고 백성들도 역시 공평하다고 일컬었다.

여기에 칠산성(七山城)이 있어 모두 관방(關防)이라고 일컫는데 수비(守備)가 몹시 소홀했다. 이에 먼저 화기(火器)를 만들어 설치하여 각 각 만 여관(貫)의 돈을 저장하여 영문(營門)의 방납(防納)에 여유가 있게 했으며,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모두 이를 없앴다.

이때 여부인(呂夫人)이 먼저 이미 서울로 돌아와서 병환이 위중하자 임금이 표신(標信)을 주어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따로 전하여 먼저 교귀(交龜)하고 돌아와서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게 했으니, 이는 특별한 은혜였다. 공이 돌아온 이튿날 여부인(呂夫人)이 하세(下世)하다.

임인(壬寅)에 목호룡(睦虎龍)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일경(一鏡) 필몽(弼夢)의 무리가 바야흐로 폭위(暴威)를 펼치자 공은 이미 위풍(威風)이 있어 여기에 빠져질 염려가 있어, 비록 중간에 임명이 있었어도 일체의 청요(淸要)의 자리까지도 문득 부임하지 않았다. 입대(入對)해서는 정제두(鄭齊斗)의 이조참판(吏曹?判)을 그대로 두도록 청하여 적(賊) 일경(一鏡)을 막도록 했다. 이리하여 드디어 그 무리의 공격을 받아서 갔는데, 필몽(弼夢)이 전조(銓曹)로 들어가자 호룡(虎龍)의 응원을 받아 역절(逆節)한 자를 전하여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을 시켰다. 공은 춘택(春澤), 중혁(重爀)의 일을 인용(引用)해서 몹시 이를 배척했다.

이에 일경(一鏡), 필몽(弼夢)의 무리가 더욱 좋아하지 않고 배척하기를 몹시 힘껏했다. 이것을 보고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않아 필마(匹馬)로 관동(關東)에 놀러가서 비로봉(毘盧峰) 절정(絶頂)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 오대산(五臺山)을 두루보고 돌아왔다. 여름에 발탁되어 관서백(關西伯)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항상 국가가 승평(升平)한지가 오래인데 병비(兵備)가 많이 허술한 것을 근심하여, 전후에 주번(州藩)의 책임자로 임명될 때 마다 뜻을 날카롭게하여 수선 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이 서쪽땅은 변방에 오랑캐가 있으므로 먼저 관액(關?)의 형편을 살피고 단도(?島), 신미도(身彌島)와 같이 역시 모두 바다를 건너 두루 살펴보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렸다. 여기에서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도리(道里)의 원근(遠近)과, 민물(民物), 양식, 기계의 많고 적은 것이 책을 펴면 분명한데, 지금 모두 비변사(備邊司)에 있다.

또 군사가 없으면 지킬 수가 없다고 하여 여러 산성(山城)의 군사들을 뽑고 무명을 거두어 영채를 만드는데 포목이 남은 것은 도로 내주고 법으로 교련(敎鍊)시켰다. 또 재물과 곡식이 많지 않으면 방비 할 수가 없다 하여 불시에 이것을 구하여 별향고(別餉庫)를 세워 쌀 여러 만 곡(斛)를 저장하고 나머지는 모두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은(銀)과 돈과 포목도 또한 쓸만큼 남긴 뒤에는 탁지(度支)하여 쓰고 남은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많이 취해서 힘 입었다고 한다.

갑진(甲辰)에 금상(今上)이 새로 즉위하자 차서없이 발탁하여 호조판서(?曹判書)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이서(吏胥)의 간사함을 방비하고 궁문(宮門)을 절제했다. 이 때는 미음에 쓸 곡식도 없어 백성이 주리고, 또 국상(國喪)을 당해서 여기에 쓸 비용이 없었는데도 여기에 대응(對應)하기를 넉넉하게 했다. 대개 공은 이재(理財)에 뛰어났는데, 용강(龍岡)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공이 처음 왔을 때에는 관고(官庫)가 텅비어 있었는데, 두 어달이 못되어 돈과쌀이 풍성해졌다고 한다. 계속해서 수어사(守禦使) 겸 비변사(備邊司)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지경연춘추(知經延春秋)가 되어 북한(北漢)을 주관(生管)했고 지의금(知義禁)으로서 일경(一鏡)을 국문하는데 참여했는데, 임금이 밤에 중관(中官)을 보내서 매 때린 흔적을 감독했다. 이로부터 공은 즐겨 국문하는데에 나가지 않고 일곱 번 부름을 어기어 벼슬이 바뀐 후에 성신(誠信)하지않게 아랫 사람을 대한다고 진계(陳戒)했다.

을사(乙巳)봄에 조정에 크게 벼슬의 이동(移動)이 있었는데 공은 용인(龍仁)의 묘려(墓廬)로 물러가 있으면서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여 탁지(度支) 및 수어사(守禦使)가 바뀌었다. 효장세자(孝章世子) 책례(?禮) 때 공이 하례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글을 올리고 돌아왔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어제 하례하는 자리에서 어렴풋이 경(卿)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몹시 기쁘다」하여 임금의 뜻이 간절하여 진퇴로 해서 틈이 있지 않았다.

처음 임인(壬寅)의 옥사(獄事) 때 당시 의논을 주장하는 자가 분한 마음을 푼다는 핑계로 살육(殺戮)을 함부로 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시배(時輩)가 새로 뜻을 얻고 보니 또 원수와 언망을 쾌하게 갚고자하여 방자히 선왕(先王)이 번안(飜案)의 장본인이라고 가리켜 핍박했다. 이에 상신(相臣)이 아주 비밀히 수차(袖?)를 올린 일이 있어 전해지는 말이 흉흉했다.

이때 공이 현(縣)을 통해서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밀차(密?)에 대해서는 비록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겠사오나 좌상(左相)의 차자(?子)가 계속해 전대(前代)의 사첩(史牒)과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는 원통하거나 원통치않거나를 말할 것 없이 옥사(獄事)를 뒤집은 것이 어찌 하나 둘 이겠습니까, 하오나 차마 선왕(先王)의 병이 있고 없는 것을 속이고 은폐한다는 등의 말을 바로 종묘(宗廟)에 고하고 안팎에 알리자고 청하는 자가 있단말입니까. 깊이 지혜로운 생각을 하시와 후세(後世)의 조롱하는 의논이 없게 하시옵소서」하자 시배(時輩)들이 글을 다투어 올려 귀양보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좇지 않았다.

이로부터 산 밑에 집을 지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물을 끌어 물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었다. 여기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출사표(出師表)를 외우면서, 거닐기도하고 맘대로 기거(起居)하여 장차 여기에서 마칠 것 처럼 했다.

병오(丙午)봄에 징하(徵夏)가 글을 올려 선왕(先王)이 인신(人臣)의 예(禮)가 없었다고 들추어 냈다는 말을 듣고, 병을 무릅쓰고 진신소(搢紳疏)를 올려 징하(徵夏)의 죄를 밝히기를 청하고, 또 인죄소(引罪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臣)의 지난날의 충성(衷誠)은 스스로 전하의 마음에 맺히고, 의리는 본래 한 세상에 밝으니, 오늘날의 시끄러운 것이 어찌 감히 여기에 이르는 것입니까. 선유(先儒)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식이 아비에게 간하는 자는 먼저 아비에게 간한죄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다시 그 간한 일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요, 신하가 임금을 들추는 자는 먼저 임금을 들춘 죄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다시 그 들춘 일을 물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臣)이 일찍부터 이러한 의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익히 아뢸 것이오니 오늘 처분하시는 죄명(罪名)은 간절히 두렵사옵건대 시끄러움을 일으키는 망녕된 말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중유(仲由:子路)는 한 포의(布衣)인데도 악하다는 소리가 그 스승에게 미치지 않았아온데, 이제 도리에 어긋난 말이 사방에서 일어나 바로 지존(至尊)에까지 범하오니, 이는 녹(祿)의 천종(千鍾)이 하나의 몸 닦는 일만 못한 것이오니 이는 모두 신의 죄 이옵니다 하여 말이 슬프고 간절했으나 금령(禁令)이 있다하여 올려지지 못했는데 당시 의논이 더욱 심히 시기하고 미워하여 또 멀리 귀양보내자고 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정미(丁未) 七월에 임금이 저쪽 사람들을 내쫓고 다시 성인(聖人)으로서의 교화(敎化)를 펴게 되자, 맨 먼저 공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했는데 공은 소(疏)를 올려 사양했으나 임금은 특별히 비국랑(備局郞)을 보내어 재촉하므로 공은 입대(入對)하여, 여론(與論)을 채택해 들어서 의리를 밝혀서 탕평(蕩平)의 근본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이리하여 대신(大臣)들과 함께 임금의 앞에서 신축(辛丑)의 여러 신하의 죄를 의논하여 정하고, 양사(兩司)의 언의(言議)가 구차한 자들을 엄중하게 배척했다. 이는 대개 공의 성질이 곧게 보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돌이키지 않기 때문 이었다.

얼마되지않아 발탁되어 판의금(判義禁)에 임명되자 공은 의논을 세워 당시 사람들에 휩쓸리지 않고 임계(壬癸) 사이에 이미 조정과 맞지 않아 밖으로 내쫓긴 자들을 이때에 이르러 전형의 권리를 쥐게되자 힘써 임계(壬癸)사람을 이끌어들이니 문득 보복(報復)한다고 이름하여 의논하는 자가 비록 이를 다투었지만 일찍이 그 덕량(德量)에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헐뜯는 자가 있으므로 공은 드디어 전형의 자리를 내놓기를 빌고 여러번 소(疏)를 올려 벼슬이 바뀌었으나 이내 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다. 무신(戊申) 三월에 도둑이 기호(畿湖)에서 생겼는데, 이보다 먼저 숙종대왕(肅宗大王) 갑술(甲戌)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다시 궁중을 바로 잡았는데, 기사(己巳)의 흉얼(凶?)과 폐고(廢錮)된 자 두어 집이 뜻을 잃은지 三十년 동안에 비밀히 이상한 계획을 길러 이 것을 쾌히 베풀려 하더니, 이때에 와서 일경(一鏡), 호룡(虎龍)의 남은 무리와 함께 서로 경솔히 합쳐져서 옳지 못한 일을 하려고 꾀 했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는 기구(耆舊)의 신하인데 그 기미를 알고 하룻밤에 백 여리를 달려와서 급변(急變)을 아뢰자, 공이 여러 대신(大臣)들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정국(庭鞠)을 설치하도록 청하고, 순토사(巡討使) 김중기(金重器)에게 명하여 수원(水原)에 나가서 진압하게 하자, 중기(重器)는 장단(長湍)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기를 청했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곽자의(郭子儀:唐나라 장수)는 十三기(騎)를 거느리고 토번군(吐蕃軍)으로 들어갔고, 주아부(周亞父:漢나라 사람)는 가면서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낙양(洛陽)에 이르러 오초(吳楚)가 놀랐으니 중기의 말이 그르도다」했다.

중기의 군사가 이미 나가자 도하(都下)가 더욱 흉흉하고 두려워하자 공은 성문(城門)을 닫지않아 이로써 인심을 진정시키시옵소서」하고 또 애통한 조서(詔書)를 내려 방(榜)을 거리에 붙여 적을 사로잡고 그 무리를 바치는 자는 중하게 상을 주어 적의 계획을 해산시키라고 청하자 임금은 모두 이에 좇았다.

공은 또 영남(嶺南)을 근심하여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를 발탁하여 감사(監司)를 삼자고 청하자 임금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 때 국문에 대한 죄인의 저술이 낭자했는데 적의 우두머리는 대대로 녹(祿)을 먹는 사대부(士大夫)의 일족(一族)으로서 크고도 부후(富厚)한 자여서 혹은 집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혹은 토적(土賊)과 연결(連結)하여, 경기(京畿)와 양호(兩湖), 영남(嶺南)의 네 길이 서로 응하여 장차 일자(日字)를 약속하여 대궐을 범하려하는데 평안병사(平安兵使) 사성(思成)은 지략(智略)이 있기로 이름이 있는 사람으로서 역시 여기에 참여 했다고 한다.

이윽고 적이 밤에 성환역(成歡驛)을 침범하여 인마(人馬)를 빼앗아 갔다. 이때 찰방(察訪) 강백(姜栢)이 거짓 어머니가 죽었다 일컫고 머리를 풀고 달려와서 보고 했다. 이 때 임금이 밤에 장전(帳殿)에 거동하여 근심하는 빛이 있어 시신(侍臣)들을 돌아다보고 말하기를 「중기(重器)는 늙은 장수여서 일을 그르칠까 두려운데 어찌하리오」하자 공이 나와서 말하기를 「그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다고 했아오니 신(臣)이 비록 재주가 없아오나 충분(忠憤)은 스스로 격해집니다. 늙은 장수가 능히 진작(振作)하지 못하고 만일 앉아서 사기(事機)를 잃는다면 나라가 어찌되겠습니까 신(臣)이 청컨대 스스로 가서 구덩이에 묻히겠습니다」하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본병(本兵)의 장(長)으로서 멀리나갈 수가 없다고 하여 이를 어렵게 여기니, 공은 말하기를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본병(本兵)을 겸하면 일이 잘 될 것입니다」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병판(兵判)이 강개(慷慨)하여 스스로 나가겠다니 막을 수가 없다」하고 즉시 명하여 공을 경기(京畿)ㆍ충청(忠淸)ㆍ전라(全羅)ㆍ경상(慶尙) 네 도(道)의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하고, 이광좌(李光佐)로 병조(兵曹)의 일을 겸행(兼行)하게 했다. 그러나 광좌(光佐)는 뜰에 내려가 관(冠)을 벗고 군이 사양하는데, 공이 마침 밖에 나갔다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쫓아 들어가서 손으로 모자를 들어쓰고 소리를 높여 책망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사직(辭職)하는가」하니, 광좌(光佐)는 무연(撫然)하여 드디어 명령에 복종했다.

공은 또 박문수(朴文秀)로 종사(從事)를 삼자고 청하자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계속하여 말하기를 「병판(兵判)이 출정(出征)했으니 내가 기호(畿湖)에는 근심이 없다」하고 태복마(太僕馬)를 하사하고, 또 명하여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송조(宋祖)가 칼을 주던 뜻이니, 중군(中軍) 이하는 이 칼로 처리하라」했다. 공이 말하기를 「신(臣)이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망녕되이 중한 책임을 청했아온데, 전하께서 신의 어리석은 충성을 살피시와 신으로 하여금 힘을 내도록 하시고 이미 네 길을 신에게 맡겼아오나 감사(監司) 이하가 명령을 듣지않는 자는 장차 어찌하오리까」했다. 이에 임금은 말하기를 「그것은 또한 오직 하사한 칼이 있을 뿐이니라」했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오늘날 재정이 궁한 것이 가장 급하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큰 무명과 큰 비단으로 마음을 갖으시옵소서」하니 임금은 말하기를 「오직 경(卿)의 말대로 하겠노라」한다. 공은 또「절개를 거역한 궁하고 흉한 무리는 마땅히 죽여 없애고 남기지 않을 것이오나 원컨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하니 임금은 말하기를 「오직 경(卿)의 말대로 하겠노라」하고 계속하여 궁전(弓箭)과 초약(椒藥)을 주면서 또 말하기를 「경(卿)의 영중(營中)에 어찌 갑주(甲胄)가 없으리오마는 내가 마땅히 뒤에 보낼 것이니 전진(戰陣)에서 착용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술과 안주를 내리자 공은 술잔을 들고 절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이 주량(酒量)은 없사오나 이 술은 감히 맛보지 않을 수 없사오니 마땅히 물러가서 군교(軍校)와 함께 전하가 하사한 술에 취하겠습니다」했다. 그리고 나서 또 말하기를 「연일 국문에 임하시기에 옥체(玉體)를 움직이셨사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보중(保重)하시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은 뒤에라야 가히 생각함이 있고 얻는 것이 있을 것 입니다」하니 임금은 머리를 끄덕였다.

十八일 무진(戊辰)에 마보병(馬步兵) 二천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과천(果川)을 지나 수원(水原)에 이르니, 적은 이미 十六일 밤에 청주성(淸州城)을 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을 죽이고 상당(上黨)의 양곡과 병기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때는 군사를 쓰지 않은지가 백년이나 된 터여서 장사(將士)들이 울면서 대오(遂伍)에 나갔는데 백리도 가지 못하여 이미 배가 고파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거기에 청주(淸州)의 소식이 이르니 더욱 놀라서 시끄러워 능히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은 군사를 불러모아 족히 근심 할 것이없다」타이르자 무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공은 드디어 말 위에서 장초(狀草)를 써서 아뢰기를 「신(臣)이 바로 청주(淸州)로 향해서 감사(監司)와 군사를 향하여 적을 소멸시키려 했사오나 다시 생각해 볼 때, 이천(利川)ㆍ죽산(竹山) 두 길은 준비가 없는데 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까 두려워하여 신(臣)이 이미 죽산부사(竹山府使) 최필번(崔必蕃)으로 하여금 나가서 막고, 지키는 총융병(摠戎兵)으로써 돕게 했습니다.

또 신(臣)은 생각하옵건대 경성(京城)의 숙위(宿衛)가 수가 적고 약하겠아옵기로 과천현감(果川縣監) 권성징(權聖徵)으로 하여금 안산(安山)ㆍ양천(陽川)ㆍ금천(衿川)ㆍ과천(果川)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량(露梁) 나루를 건너 교장(敎場)에 진(陣)을 치고 조정의 지휘를 받게했아온데, 성징(聖徵)의 군사가 혹 불시에 강을 건너면 도읍 백성들이 쉽게 소란해 질 것이오니, 청컨대, 먼저 진장(陣將)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배를 정리해놓고 기다리게 하시옵소서.

또 성안에 간사한 무리들이 잠복(潛伏)해 있을 까 두렵사오니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간악한 무리들을 적발해서 모두 수색해서 체포하게 하시옵고, 만일 상류(上流)로부터 물을 따라 내려오면 동교(東郊)가 가장 비어 있사오니 마땅히 준비가 있어야 할 것 입니다. 평안감영(平安監營)에 二만명의 작대군(作隊軍)이 있아옵고, 또 따로 무사(武士)들이 있어 자못 정예(精銳)하오니 그 절반을 꺾어 마땅히 그들로 하여금 입근(入覲)하게 하시옵소서. 서쪽 변방도 역시 중요한 곳 이오니 그 나머지는 마땅히 머물러서 지키게 하시옵소서 각 나루의 나룻배를 거두어 한 곳에 모아두고 마땅히 다만 용진(龍津)의 배만 머물러 두어 동영(東營)으로 통관(通關)하게 하시옵소서」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많이 채택해서 실시했다. 또 장계를 올려 현명(顯命) 및 이광덕(李匡德)ㆍ이도겸(李道謙)으로 종사관(從事官)을 삼아 경기ㆍ전라ㆍ충청도를 나누어 맡아 다스리게 하라고 청했는데, 이때 현명(顯命)은 순토사(巡討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김중기(金重器)의 군중(軍中)에 있다가 그대로 여기에 쫓았다.

경오(庚午)에 진위진(振威津)의 현(縣) 남쪽 들 가운데에 나갔는데, 초경(初更)에 나졸(邏卒)이 와서 보고 하기를, 한 말에 탄 장수가 두 보졸(?卒)을 데리고 진(津)앞에 와서 고하기를, 의금부(義禁府)의 가도사(假都事)가 평택(平澤) 으로부터 죄인을 잡아가지고 가는데, 데리고 가는 마보병(馬?兵)이 많아서 대진(大陳)을 경동(擎動)시킬 것 같아서 사람을 시켜 먼저 보고 한다고 한다. 이에 공이 잡아 들이라고하여 묻기를 「군사를 낸 자가 누구냐」하니 대답하기를 「현감(縣監)이라」고 한다.

이날 아침에 평택현감(平澤縣監) 유중겸(柳重謙)이 도망해 돌아와서 수원(水原)의 진(陣) 앞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가 차고 있는 여러 가지가 모두 병영(兵營)의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이는 청주(淸州) 적의 첩자(諜者)가 아닌가 의심하여, 그 온 것이 반드시 계략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군중(軍中)에 명령하여 엄중히 경계하고 기다리게 했다.

이윽고 가도사(假都事)가 뵙기를 청하므로 또 명령하여 잡아들이게 했더니 그는 곧 무관(武官)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한 김성옥(金聲玉)으로서 장사(將士)가 얼굴을 아는 자이다. 이에 또 그것이 적이 아닌가 의심하여 나가게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진(陣) 뒤에서 함성(喊聲)이 크게 일어나고 대포알과 화살이 어지러이 날아와서 인마(人馬)가 요란한데 어지럽더니 두 세사람 백의(白衣)의 적이 가로 세로 달려오는 것을 진중(陣中)의 한 병졸이 칼을 빼들고 바로 치려하자, 군관(軍官) 신진숙(申震肅)이 달려 나와서 칼을 빼앗아 그를 치고 그 길로 적의 첩자(?者) 八ㆍ九인을 베이고, 성옥(聲玉)을 베이니 진중(陣中)이 차츰 안정되었다.

이에 교련관(敎鍊官)으로 하여금 영기(令旗)를 정리하고 암령(暗令)을 내어 수색해 체포하게 하고, 또 두어 장수를 잡아 장차 베이려 하는데, 한 적이 거마목(拒馬木)을 뛰어 넘어 달아 나는데 밤이 어두워 뒤를 쫓지 못했다. 이때 적장(賊將) 이배(李培)가 국문을 받을 때 스스로 말하기를, 자객(刺客)이 되어도 순무(都巡撫)의 진(陣)에 들어왔다가 잡혔는데 도망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적이 거사(擧事)할 때 먼저 병조판서를 없애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대개 적이 여러 고을의 양초군(粮草軍)에 섞여서 군중(軍中)에 잠입(潛入)했고, 평택(平澤)의 적이 또 성옥(聲玉)을 따라와서, 안을 꺾고 밖을 가리는 계획을 쓰려고 했으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중(陣中)이 어지럽고 일이 급해지자 성옥(聲玉)은 적의 정세(情勢)에 따랐는데 이는 실로 힐문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일군(一軍)이 모두 흔들리는데, 현명(顯命)이 칼을 집고 장막 앞에 이르자 공은 바야흐로 책상에 의지하여 보통 때와 같이지휘하고 있는데, 현명(顯命)이 보니 갑주(甲胄)가 앞에 있다. 이에 나는 칼로 땅을 치면서 말하기를 「사또께서는 이 길로 달아나려 하십니까」하니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종사(從事)가 겁을 내는도다」하고 명하여 물러가게 했다. 그 후에 공은 현명(顯命)에게 말하기를 「조종사(趙從事)는 너무 강개(慷慨)하지 않은가」했는데 현명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끄러워하고 송구해 하기를 마지 않는 바이다.

공이 종사(從事)들과 함께 진병(進兵) 할 일을 의논하는데, 혹은 청주(淸州)를 취하고 죽기로 결단하여 싸우자하고, 혹은 쌍수성(雙樹城)을 점령하고 나서 흩어진 적의 무리를 알아보는 것이 만전(萬全)의 계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우선 직산(稷山)으로 나가 주둔한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했다.

임신(壬申)에 진군(進軍)해서 소사(素砂)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나니 전대(前隊)는 이미 직산(稷山) 길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말에 의지하여 갑자기 두 종사(從事)를 불러 귀에 입을 대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 나더니 안성군수(安城郡守) 민제장(閔濟章)에게 명령하기를, 「본군(本郡)으로 돌아가서 양초(粮草)를 정리하고 기다리면서 직산(稷山)의 대진(大陣)으로 운반해간다고 큰 소리로 선전하라」했다. 공은 또 당보(塘報)의 초관(?官)을 불러 쥐고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한 다음 암령(暗令)을 내리기를 흔들면서 샛길로 안성(安城)으로 가라고 했다.

처음에 공이 과천(果川)에 이르러서 보니 기졸(旗卒) 방득규(方得規)가 정밀하고 굳세어 일을 맡길만 하겠으므로 별무사(別武士)에 승진시켜 우선 그의 환심(歡心)을 얻고, 비밀히 명령을 내려 청주(淸州)로 가서 적의 길을 정탐하게 했다. 득규는 소금장사로 가장(假裝)한 적을 사로 잡아 왔는데, 그 적은 진친(鎭川)에서 날자를 약속하고 군사를 나누어 한쪽은 죽산(竹山)으로 나가고 한쪽은 안성(安城)으로 나가서 민제장(閔濟章)을 습격해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공은 이미 안성(安城)으로 들어가고자 하여 남에게 앞서 사람을 빼앗을 계교였으나 이 계획이 누설될까 두려워서 직산(稷山) 큰 길로 행한다고 큰 소리로 선전하게 했던 것이다. 이 길에서 또 계속해서 적의 정탐하는 자 四ㆍ五명을 잡았는데 그 말이 모두 같았으므로 뜻이 더욱 결정 되었던 것이다.

안성(安城)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진(陣)을 이루고 나서 보니 앞산에서 불을 들고 포(砲)소리와 함성(喊聲)이 계속 일어나더니 후졸(候卒)이 급히 보고 하기를 적이 진(陣)을 범한다고 한다. 이때 풍우(風雨)가 일고 인마(人馬)가 먹지 않은 것이 반이나 넘어 무리의 마음이 황황한데 공은 굳게 누워 움직이지 않으면서 시초(柴草)를 독려하여 날라다가 진(陣) 밖 사면에 불을 놓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경솔히 포환(砲丸)을 쏘지말고 적이 가까이 온 뒤에 비로소 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미음과 죽을 쑤어 병사들에게 먹인 다음에 코 골고 자기를 평상시와 같이하니 진중(陣中)이 이 힘으로 편안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진(陣) 밖 백 여보 되는 곳에 인마(人馬)가 탄환에 맞아 죽은 자 및 쌀가루와 병기를 버리고 간 자가 있다. 이는 대개 적이 어두운 안개 속에 안성(安城)의 진(陣)이라 생각하고 조금 범 하다가 진중(陣中)에서 신기전(神機箭)을 쏘는 것을 보고 경군(京軍)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놀라고 겁이나서 많이 도망해 흩어졌던 것이다. 이때 적의 괴수 인좌(?佐)가 반적(反賊) 종원(宗元) 등과 함께 물러가서 고을 남쪽 청룡산(靑龍山) 가지곡(茄之谷) 마을 속에 주둔하고서 죽산(竹山)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우리 군사와의 거리는 겨우 五리 였건만 우리 군사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가 교련관(敎鍊官) 권희학(權喜學)이 적의 첩자(諜者)를 사로잡아서 비로서 이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공이 멀리보니 그 지형은 三면이 막혔고, 가운데에는 큰 마을을 껴안고 앞으로는 평야(平野)에 임해 있었다. 이에 중군(中軍) 박찬신(朴?新)으로 하여금 마보병(馬步兵)을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면서 경계하기를 「깃대와 북을 눕히고 빨리 산뒤로 해서 달려가 먼저 높고 험한 곳을 점령하고 두 날개를 펴고서 포환(砲丸)과 화전(火箭)을 쏘아 불태우면 적이 반드시 앞들로 나가 달아날 것이니 마군(馬軍)으로 이를 쫓게 하라하고, 또 군관(軍官) 민제만(閔濟萬)으로 하여금 안성(安城) 군사를 거느리고 의병(疑兵)을 만들어 적의 달아나는 길을 막게했다.

그러나 찬신(?新)이 명령을 어기어 적이 이를 깨달아 진중(陣中)에 붉은 양산과 흰기를 펴니, 산위의 관군(官軍)은 지리(地利)를 잃게되어 감히 습격하지 못했다. 이 때 권희학(權喜學)이 마을 늙은 할미를 사로잡아 적장(賊將)이 마을 속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군관(軍官) 이만빈(李萬彬)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장사(壯士)가 아닌가 조그만 적을 보고 겁을 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자, 만빈(萬彬)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내 나가서 죽으리라」하고 말에 올라 용맹을 자랑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능히 나를 따르겠느냐」하니, 중초군(中哨軍) 조태선(趙泰先) 등 五十여인이 따르기를 원한다.

이에 마을 속으로 달려 들어가니 반장(反將) 종원(宗元)이 말이 사나와서 재갈을 물릴 수가 없어 바야흐로 천천히 가다가 관군(官軍)이 오는 것을 보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시간을 연장시키려 했더니 목숨이 여기에 이르렀구나」하고 칼을 빼들고 나오려 하는 것을 태선(泰先)이 앞으로 달려나가 포환(砲丸) 一개로 목을 맞혀 쓰러뜨리니, 만빈(萬彬)이 말에서 내려 이 것을 베이고 또 군관(軍官) 몇 사람을 베어 깃대에 달아 매고서 떠들면서 달려서 산 위로 올라오니 적들은 바라보고 기운이 빠지고, 게다가 활과 포(砲)는 모두 젖어서 쓸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산 마루로 달아난다.

관군(官軍)이 적의 진(陣)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힘을 뽐내어 올라오니 적은 남쪽으로 달아나고자 하다가 제만(濟萬)의 군사를 보고 다시 서쪽으로 가고자 하는데 형세가 더욱 위축해져서 깃대와 북을 버리고 사방으로 무너진다. 이에 관군(官軍)은 쫓아가서 백 여명을 베이고 병기와 홍산(紅傘)을 거두었다.

처음에 관군(官軍)이 올려다 보면서 적을 치다가 산 위에서 나갔다 물러갔다하여 유인하는 모양을 하더니 적과 관군(官軍)이 모두 거두어 가지고 산에서 내려 간 뒤에는 승부(勝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종사(從事)들이 층계 위에서 바라보다가 관군(官軍)이 적의 계책에 빠졌는가 하여 걱정하자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하더니 해가 한 낮이 되기 전에 말이 나는듯이 남쪽으로 부터와서 이긴 것을 보고 하더니 이윽고 찬신(?新)이 군사를 정돈 해가지고 개가(凱歌)를 올리면서 돌아오니 병사들과 말이 기뻐서 뛴다. 이에 첩서(捷書)를 쓰고 종원(宗元)의머리를 함속에 넣어 달려가서 서울에 보고했다. 처음에 적이 밤에 진중(陣中)을 침범했을 때 안개가 어두어 지척을 분별 할 수 없기에 현명(顯命)이 화전(火箭)을 쏘아 마을을 태워서 밝게하자고 했으나 공은 듣지 않았으니 이는 민물(民物)에 연소(延燒)될까 두렵기 때문 이었다.

계유(癸酉)에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점심을 먹게 한 다음에 떠나서 죽산(竹山)으로 행하는데 좌우가 모두 겹겹으로 쌓인 메 언덕과 깊은 골짜기였다. 장항령(長項嶺)밑에 도착하자 전군(前軍)이 적이 있다고 보고한다. 공이보니 고개가 높은데 적이 먼저 점령할까 두려워서 서둘러 마보군(馬?軍)에게 영을 내려 두어 길로 함께 나가게 했더니 적의 마군(馬軍) 두 세명의 파수군이 고개 밑에 있다가 관군(官軍)을 바라보고 크게 놀라서 무너진다.

관군(官軍)은 안성(安城)에서 이긴 뒤로부터 기운이 바야흐로 성한데 마침 서풍이 고개 위로부터 거꾸로 불어와서 깃발이 소리를 내어 펄럭인다. 이 때 적의 대대(大隊)는 바야흐로 들 가운데에 진을 치고 장막을 많이 치고 기를 세우고 북을 치면서 술을 길으다가 바라보니 관군(官軍)이 포를 쓰고 깃발을 휘둘러도 무리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陣)의 모퉁이가 조금 움직이더니 관군(官軍)이 바람을 이용하여 가파른 고개를 달려 내려 오는데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관군(官軍)은 바로 죽산부(竹山府)앞에 이르니 적이 크게 무너진다. 이에 관군은 사면에서 엄살하여 먼저 위부원수(僞副元帥) 정세윤(鄭世胤)과 위죽산부사(僞竹山府使) 정계윤(鄭繼胤)을 사로잡아 베이니 적들은 많이 피해서 어지러운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섞인다. 그러나 공은 죄없는 사람이 죽음을 당할까 근심하여 영을 내리기를 「산채로 사로잡는 자는 상을 주고 두려워서 좇는 자는 모두 돌려 보낸다」하니, 이때 어떤마을 백성이 거괴(巨魁) 인좌(麟佐)를 결박해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인좌(麟佐)는 안성(安城)에서 패하자 밤에 산골짜기로 달아나다가 도로 죽산(竹山)으로 왔으나 죽산의 진(陣)이 또 무너지자 위청주목사(僞淸州牧使) 권서봉(權瑞鳳), 위진천현감(僞鎭川縣監) 이지경(李之璟), 위장군(僞將軍) 목함경(睦涵敬) 등과 함께 도망해 숨었다가 사로 잡혔는데, 가지고 있는 대원수(大元帥)의 도장이 말(斗)만큼 컸다.

이에 종사(從事) 및 여러 장교(將校)들이 모두 분하게 여겨 찢어 죽이려 했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 적은 마땅히 함거(檻車)에 가두어 서울로 보내어 오형(五刑)을 갖추어 베어야 한다. 」하고 듣지 않았다. 이 때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흰 옷을 입은 병졸이 산골짜기에서 왕래하면서 엿보고 있다.

이것을 보고 인좌(麟佐)가 스스로 말하기를 「충주(忠州) 군사와 모이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공이 군중(軍中)에 명하여 계엄(戒嚴)하게 하고, 이튿날 새벽에 영(令)을 내리기를 「인좌(麟佐)를 베어서 그 머리를 기위에 달아매고 크게 쓰기를 「적괴(賊魁) 인좌(麟佐)」라고 쓰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는 딴 적이요 인좌(麟佐)가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함거(檻車)에 가두어서 서봉(瑞鳳), 함경(涵敬) 등과 함께 달려가서 서울에 갖다 바치게 하고, 현명(顯命)으로 하여금 첩서(捷書)를 초잡게 했는데 벌여서 쓴 말이 있어 공은 이를 기뻐하지 않고, 드디어 입으로 두어 구절을 불렀는데 다만 말하기를 「신(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죽산(竹山)으로 오자 역적들은 기와 북을 바라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숨고 달아났아옵기 이 사실을 급히 아뢰옵니다. 」했다.

장계(狀啓)가 이르자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임금의 앞에 있다가 탄식하기를 「도순무(都巡撫)의 자기 공을 자랑하지 않은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했다. 얻은 군기(軍器)와 마필(馬匹)과 미포(未布)가 무수히 많은데, 박문수(朴文秀)가 모두 사졸(士卒)에게 상으로 주자고 했으나, 공은 말하기를 「군기(軍器)와 역마(驛馬)를 함부로 나누어 줄 수가 없으니, 임시로 민제만(閔濟萬)으로 죽산부사(竹山府使)를 삼아 그로 하여금 수습해서 각영(營)으로 도로 보내게 할 것이며, 고을 백성의 유산(流散)한 자를 편안히 모으고, 적의 도망해 숨은 자를 체포해서 베이라」하고 떠나서 청주(淸州)로 향했는데, 청주에 이르자 장수와 아전들이 이미 계획을 세워 위병사(僞兵使) 신천영(申天永) 및 그 무리 十八인을 체포해 베이니 고을 지경이 숙청(肅淸)되었다.

공은 이봉상(李鳳祥), 남연년(南延年)의 시체 앞에 가서 곡(哭)하고, 신병사(新兵使) 조담(趙淡)의 군중(軍中)에 들어가서 임금의 뜻을 말하고 모두 파하고 돌아가 농사짓게하니 기뻐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임금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손수「志確印高」라는 네 글자를 써주고 계속하여 친히 편지로 장유(奬諭)하기를 「수일 안에 계속해서 첩보(捷報)가 올라오니, 가위 공은 한 세상에 빛나고 이름은 죽백(竹帛:책)에 남길 것이로다. 공이 군대에 있어 백 가지 사무에 수응(酬應)하기에 침식(食)을 제 때에 할 수가 없어서 혹 그 피로할까 걱정스러우니, 청컨대 사소한 일은 종사(從事)에게 맡기라」했으나 공은 좇지않고 하루에 한 번씩 진중(陣中)을 순회하고, 비록 맨 아래에 있는 사졸(士卒)이라도 반드시 손을 잡고 정녕히 타 일렀다. 밤에 도방에 거처하고, 비가 와도 유의(油衣)를 입지 않는다.

매양 유지(諭旨)가 내려오면 문득 비분(悲憤)해서 눈물을 흘리고 우니 일군(一軍)이 여기에 감동했다. 장리(將吏)가 죄가 있으면 조금 책망을 할 뿐이요 한 사람도 매 때리지 않는다. 이에 현명(顯命)이 간하기를 「위엄으로써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면 무리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국가가 승평(昇平)한지 오래여서 서울 군사는 본래 교활한데 갑자기 형육(刑戮)을 베풀면 반드시 원망하고 두려워하여 마음이 떠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차라리 은의(恩意)로 어루만지고 충의(忠義)로 격동시켜서 죽을 힘을 내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쓰는 병법(兵法)은 이광(李廣)의 법이다」했다.

공이 처음에 수원(水原)에 이르러서 종사(從事)로 현명(顯命)을 부르기에 내가 순토사(巡討使)의 진중(陣中)으로부터 달려가 뵈오니, 그 때 밤이 이미 깊었는데 군리(軍吏)가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식사입니다」하니 공은 말하기를 「좋다 식사를 가져 오너라」하니, 나는 생각에 마침 그렇게 되었거니 했으나 그 후일에도 이와 같았다.

현명(顯命)이 죽산(竹山)으로부터 먼저 돌아와서 승지(承旨)로서 임금의 명령을 받고 노량(露梁) 강 위에 가서 맞아 공을 보고 절하고 일어나자 땀을 흘리고 앉아서 손으로 이를 잡기에 익히보니 갈 때의 옷을 말아 입지 않았는데 이 때는 날이 더운지 이미 오래였다.

공이 청주(淸州)에서 장차 군사를 돌이키는데, 인좌(麟佐)의 아우 웅보(熊輔)가 영남(嶺南)사람 정희량(鄭希亮) 등과 함께 또 군사를 일으켜 모반(謀反)하여 안음(安陰), 거창(居昌), 삼가(三嘉), 합천(陜川), 함양(咸陽) 등 고을이 모두 함락되었다. 처음에 공이 안성(安城)에서 영남(嶺南)에 격문(檄文)을 날려 청도군수(淸道郡守) 정석범(鄭錫範)과 칠곡부사(漆谷府使) 유동무(柳東茂)로 도부총장(都副摠將)을 삼아 안동(安東)의 정포(精砲)를 거느리고 나가서 추풍령(秋風嶺) 길을 막게 했는데, 석범(錫範) 등의 군사가 미처 떠나기 전에 적이 이미 떠났다.

공이 변을 듣고 삼남(三南)의 감병사(監兵使)에게 전령(傳令)을 내려 방략(方略)을 지휘하게 했는데, 이 때 임금의 명령으로 호서(湖西)에 진영(鎭營)을 머무르게 했다가 이윽고 또 유시(諭示)가 있어 호령간(湖嶺間)에 진주(進住)하여 여러 진(鎭)을 지휘하여 남쪽을 넘보는 근심이 없게 하라고 했다.

공이 유지(諭旨)를 받자 즉시 떠나서 문의(文義)를 거쳐 금산(金山)을 지나 추풍역(秋風驛)에 이르러 들으니 적이 이미 평정되었다고 한다. 대개 웅보(熊輔)가 계속해서 영외(嶺外)에서 일어나 인좌(麟佐)와 표리(表裡)에서 서로 응해서 북쪽을 범할 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안성(安城), 죽산(竹山)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고개를 떨구고 먹지 못하고 있는데 또 여러 진(鎭)의 군사가 좌우에서 함께 나오니 적은 더욱 두려워하여 도망하다가 휘하(麾下)의 적에게 결박 되었다.

성주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爀)이 나가서 합천(陜川)의 적을 치니 적은 군교(軍校) 하세호(河世浩)로 하여금 와서 싸움을 청하게 하고 또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본다. 이에 보혁(普爀)이 안성(安城), 죽산(竹山)에서 이긴 문서를 내보이니 세호(世浩)는 크게 두려워하여 돌아가서 적을 사로잡아 가지고 자수(自首)한다. 이에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의 적은 모두 평정 되었다. 군사를 낸지 겨우 수 十일에 선봉(先鋒)의 졸병 하나도 꺾이지 않았다.

四월 을유(乙酉)에 지례(知禮)로부터 거창(居昌), 안음(安陰), 함양(咸陽)을 돌면서 금어군(禁御軍)으로 서적을 따른 자들을 불러 모아서 관청 뜰에 꿇어앉게 하고 조정의 유지(諭旨)를 쥐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국가의 양육(養育)을 받으면서 어찌해서 적을 좇았느냐. 성상(聖上)의 죽이시지 않으심을 입어 너희들의 머리가 보존되었지만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쳐다보겠느냐. 또 이 다음날 당번(當番)을 하게 되면 능히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느냐」하니 여러 군사들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고, 좌우에서 보는자들도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군중에 명령하여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고, 마을에 가서는 사민(士民)들을 달래어 편안히 농사에 힘쓰라고 하는 것을 죽산(竹山)에서와 같이 했다.

기축(己丑)에 군사를 정비해 가지고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전주(全州)에 이르러 크게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니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다투어 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맞았으나 이를 모두 사례하고 받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아직 안성(安城)에 이르기 전에 대신(臺臣) 신로(申魯)가 거짓 두류(逗留)한다고 고하자, 임금은 엄한 교서를 내려 내쫓았었는데, 공이 대궐에서 나올 때 임금께 청하기를 「사성(思晟)이 잡힌 것은 사실이 없는 일이오니 즉시 신(臣)의 군중으로 보내주시옵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에 경(卿)이 아니면 반드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했다.

이윽고 사성(思晟)이 반역(叛逆)의 죄로 베임을 당하자 공은 황공히 은진(恩津)에 이르러 급히 아뢰어 백의(白衣)로 명령을 기다리겠다고 청하고,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돌아오게 하고, 즉시 군중을 떠나 먼저가서 밤을 새워 용인(龍仁)의 선영(先塋)에 이르니,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말을 달려가서 회유(回諭)하기를 「기호(畿湖)를 평정한 것과 영남(嶺南)에서 첩서(捷書)가 올라온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인데 시끄러운 망녕된 말을 어찌 반드시 깊이 혐의한단 말인가. 그날 경연(經延)에서 말한 것은 결코 딴 뜻이 없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신명(神明)도 아는터이니 경(卿)은 안심하고 즉일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주야로 바라는 바에 부응(副應)해 달라」했다.

무술(戊戌)에 노량(露梁)에 이르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서 수고로움을 위로했고, 기해(己亥)에 공이 서울에 돌아오자 온 성안에 사민(士民)들이 나와서 맞았는데 사졸(士卒)들이 오랫동안 나가있어 의갑(衣甲)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이따금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임금이 숭례문(崇禮門)에 거동하고 또 지진사(知申事)에게 명하여 노문(勞問)하게 한뒤에 노포(露布)를 내오는 것이 끝나자, 공이 금주홍갑(金胄紅甲)으로 무릎을 꿇고 적의 괴수의 수급(首級)을 바치니 임금이 명하여 깃대에 달게하고, 계속하여 명하여 입시(入侍) 하게하고 임금이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흉한 무리를 소탕하여 종묘와 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두 동조(東朝)가 기뻐 하게 한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이로다」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이는 성상(聖上)의 위덕(威德)이오니 신(臣)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하고, 계속하여 인죄(引罪)하고 물러가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인(知人)과 성인(聖人)도 다 나타내기는 어려운 것으로서, 역심(逆心)을 나도 또한 알지 못하고 끝에 가서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시켰던 것인데, 경(卿)은 어떻게 사성(思晟)을 알았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안성(安城)으로 들어간 것이 첫 번째의 기이한 공이었다」하고, 계속하여 명하여 중군(中軍), 별장(別將)과 함께 시위(侍衛)하고 대궐로 들어오게 하여 선정전(宣政殿)에 입시(入侍)하게 하고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을 내가 진실로 아름답게 여기노라 그러나 정이(鼎彛)에 공을 기록하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했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신(臣)이 삼군(三軍)의 원수(元帥)로서 여러 날 머물러 있어 죄만 있고 공은 없아온데어찌 큰 공을 말하오리까 신(臣)의 할아비 고 상신(故相臣) 모(某)는 인조조(仁祖朝)때 힘껏 훈명(勳名)을 사양했아오니 신(臣)은 돌아가서 선조(先祖)를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하니 임금은 말하기를 「경(卿)이 아니면 어찌 오늘이 있겠는가. 내 다만 김중만(金重萬)과만 삽혈(?血) 한단 말인가」했으니 중만(重萬)이란 곧 난이 일어난 처음에 상변(上變)한 자이다.

임금은 명하여 술을 내리게 하고 말하기를 「도순무(都巡撫)는 앞으로 나오라」하고, 친히 큰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말하기를 「중군(中軍), 별장(別將)과 함께 마시라」하고, 계속하여 녹공(錄功)하여 원훈(元勳)을 삼았으나 공은 힘껏 사양했다. 그러나 임금은 돈독하게 권면(勸勉) 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심지어 말하기를 「내 마땅히 송조(宋祖)가 공신(功臣)을 보전하던 뜻으로 경(卿)을 대접하리라」하니, 공이 부득이 하여 명령에 응하여「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力奮武功臣)」一등(等) 제一인에 책록(策錄)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지고, 특별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成) 겸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는데, 간절히 병조판서를 사양하자, 또 총융사(摠戎使)에 임명되어 여러번 사양해도 되지 않았다.

六월에 매복(枚卜)하여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되었다. 공이 이미 높은 공훈(功勳)에 책록(策錄)되고 즉시 또 나가서 높은 직책을 맡게되니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감히 나가지 못했다. 마침 급변(急變)이 있어서 임금이 친국(親鞠) 하게되자 부득이 나가서 국문에 참여하고 나서 물러나와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어찌 오랫동안 이것을 누릴 수 있는가. 속히 죽어서 돌아가 부모를 뵙는 것이 다행이다」했다.

이윽고 대신(臺臣)이 소(疏)를 올려 공을 헐뜯자 공은 즉시 물러나 동교(東郊)로 나가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서 돈독하게 권면하는 비지(批旨)를 내렸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내가 경(卿)에게 의지하고 믿는 것은 어찌 다만 동량(棟樑:重任을 맡길 사람)이요, 주석(柱石:重任을 맡은 신하)일 뿐이다. 실로 고굉(股肱:믿는신하)이요 나라의 보배이다」하고, 또 손수 편지를 써서 돈독하게 타일렀으나 공은 끝내 나가지 않았는데, 우연히 적은 병에 걸려 十여일만에 졸지에 동호(東湖)의 우사(寓舍)에서 역책(易策):군자의 죽음)하니 임금이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하교하기를 「나라의 주석(柱石)이요 나라의 심복(心腹)이었는데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이냐」하고, 성밖에서 망곡(望哭)을 하고자 하자 여러 신하들이 말려서 드디어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를 써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금천교(禁川橋)에서 거애(擧哀)하는데 임금이 몹시 슬프게 우니 좌우에 모신 자들이 모두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임금은 어의(御衣) 二벌, 비단과 장생판(長生板)을 내리고, 또 호조(?曹)에 명하여 성문 밖 가까운 곳에 집을 사서 빈소(殯所)를 옮기게 하고, 근시(近侍)를 보내서 조상하고, 명하여 복이 끝난 후에 그 아들이 벼슬에 나오게 하고, 특별히 부학군(副學君)의 사신 나가는 것을 바꾸어 장례 지내는 일을 관리하게하고,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여러 천 마디에서 유명(幽明)을 감동시켰으니, 죽은 이에게 베푼 예가 옛날에도 없는 일이었다.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여부인(呂夫人)을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 껏 해서, 집이 본래 군색한데도 힘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드렸고, 귀(貴)하게 되자 봉록(俸祿) 및 외방(外方)에서 보낸 물건을 모두 여부인(呂夫人)에게 올리고 터럭만큼도 사사로이 갖지 않았다. 주군(州郡)에 있어서는 공양(供養)하기를 지극히 풍성히했고, 형제와 자매(姉妹)들에게 나누어주어 해마다 재물과 곡식을 주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힘썼다.

조상 받드는 일에 독실하여 비록 먼 조상이라도 반드시 묘지(墓地)에 참배했으며, 묘노(墓奴)와 묘전(墓田)을 두고 비석을 세워 표 했다. 지극히 가난한 종족(宗族)의 혼상(婚喪)에는 많은 돈을 주어 도왔다. 여부인(呂夫人)의 상사를 당해서는 애모(哀慕)하기를, 마치 어린애와 같이 했고, 묘하(墓下)에 집을 짓고서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고 곡(哭)해서 비록 큰비나 눈이 내려도 피하지 않았다.

죽을 마시면서 三년을 마치니 이때 공의 나이 이미 五十세 였다. 집에서 양생(養生)하는 것이 본래 박(薄)하지 않다가 위(胃)를 앓게 되어 건강을 잃어서 친히 생강, 계피(桂皮) 등을 먹었으나 끝내 듣지 않아서 모양과 정신이 손상되고, 다리가 마비되어 능히 일어나지 못하니 보는 자가 공을 위해서 슬프게 여겼다. 이 때는 상례(喪禮)가 어긋난지 오래였으므로 군자(君子)들은 더욱 공을 착하게 여겼다.

공이 이미 졸(卒)하자 경연(經筵)의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여 공을 포상(褒賞)하자고 청하자 임금은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반드시 효자(孝子)의 가문(家門)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 정히 이를 두고 한 말이다」하고 명하여 그 문에 정려(族閭)하게하고 태상(太常)에게 말하여 시장(諡狀)을 올리게하여 시호(諡號)를 의논하기를, 충효(忠孝)라 했다.

그 뒤에 임금의 수레가 공의 집을 지나다가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집에 있어서는 효자가 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기이 하도다」했다. 공은 풍자(風姿)가 크고 훌륭했으며 기골(奇骨)이 얼굴에 가득하고 수염이 무성했다. 징하(徵夏)을 의논할때 공은 여러 경재(卿宰)들과 함께 내 백씨(伯氏) 대사간(大司諫)의집에 모였었는데, 이 때는 벼슬이 폐해져서 물러가 있은지 三년이나 된터에서 마치 죽은 재가 다시 불탈 수가 없는 것 같을 때였다. 그러나 공이 매양 부축을 받으면서 자리에 나와 앉으면 웅혼(雄渾)하고 숭심(崇深)해서 바라보면 마치 큰 산과 큰 구렁과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만족히 여겨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공은 구차하게 풍속에 따르지 않고 애써 이름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일에 임하면 빠르게 흐르는 물이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용맹이 있고, 뜻을 지키는 데에는 만 마리의 소를 돌이키기 어려운 것 같은 확실함이 있었다. 바야흐로 당(黨)의 습관이 날로 굳어지자 뒷걸음치고 물러가 피하기를 겁이 많은 지아비와 같이 했지만, 국가의 급한 일에 있어서는 의연(毅然)히 삶을 버리고 나갔으니, 이는 대개 평소에 축적(蓄積)한 것이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다.

서생(書生)으로부터 일어나서 상방검(尙方劍)을 차고 사로(四路)를 전제(專制)하여 마침 오랑캐가 바야흐로 세력을 펼 때 소탕하고 국세(國勢)를 이미 위태로울 때에 높여서 울연(蔚然)히 간성(干城)과 주석(柱石)의 도움이 되었으니 어찌 장한 일이 아니었는가.

이제 대체로 농사 짓는 자는 들에서 밭갈고, 장사하는 자는 길에 다니며, 사대부(士大夫)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 부모는 위에 편안하고 처자(妻子)는 아래에서 기뻐하니, 아아! 이것이 누구의 공이었나 대배(大拜) 하게 되자 맨 먼저 양역